프로이별러

새우와 치아바타

by 희수공원

다섯 손가락이 뚫린 보라색 반 벙어리장갑에 기대를 가득 쥐고 시작된 일이었다. 찬 바람에도 지문을 눌러가며 스마트폰 화면을 더듬는다. 지난 글자가 과거가 되면서 멀어져 간다. 행복했습니다.


프로이별러라는 별명답게 단호하다.


든든한 행복과 감사를 남기며 오늘도 이별한 것들에 경의를 표한다. 가장 추운 날 가장 두꺼운 코트를 입고 걷는다. 바람이 가슴으로 파고 들어와 온몸을 훑고 떠나며 남긴 허무에 속이 더 헛헛하다. 길 건너 원조집인 듯 낡은 건물의 해물탕 속에서 뜨거운 미련을 본다. 벌써 몇 번째 안녕이라 하고 있는지.


바라클라바 뒤통수와 목덜미를 숨기려다 과감하게 벗어버린 만용에 눈물이 고드름이 된다. 이 추운 날 끊는 솥 안에 들어앉은 대하는 바라클라바를 어서 벗어나고 싶을 거다. 현란한 손짓으로 새우의 머리 뚜껑을 떼어내니 뽀얗게 불어 터진 볼 위에 까만 작은 눈이 노려본다. 시원하다, 그리고 섭섭도 하다, 오늘은 먹지 않고 버릴 거라서.


그런 기대와 그런 바람과 가슴, 미련과 눈물로 새우를 용감하게 은 날 오늘도 다이어트와 이별을 한다. 칼로리만큼 배가 솟아오르고 빨간 새우의 자극이 디저트를 부른다.


이별하자마자 만남을 준비하는 건 세상의 이치인가 보다. 짧은 길을 돌아가며 충분한 운동이라 뇌를 속이고 이내 추위를 피해 치아바타 앞에 선다. 떨리는 가슴, 불안한 쟁반, 딱 하나만. 그곳에 남아 있는 모든 빵냄새에 이별을 한다. 숙명처럼, 다시는 찾지 않을 것처럼.


상상하지 못한 치아바타의 자극적인 맛에 반드시 매운맛을 보여주고 말 테다 쓰라린 추억의 방향으로 주먹을 쥔다. 신하고 납작한 슬리퍼처럼 생겼다는 이탈리어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치아바타는 미운 놈 뺨 올리는 슬리퍼 대신 사용해도 좋을 것 같지만 아플 것 같지는 않아서 마음에 쏙 들진 않는다. 일단 한번 노려보고 치아바타를 입에 문다.


서로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모아 상황과 심리를 분석한 글을 읽고 있다. 철학 이론과 그 이론을 쓴 사람의 정치적 견해와 사적인 관계를 들여다보는 건 아마 그와 그녀가 현재에도 많이 오르내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거다. 존재론을 대표하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와 그의 제자이며 특별한 연인 관계였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를 읽는다.


누구의 시점으로 읽는가가 중요하지만 말과 글로 남은 사실의 행간에는 의외의 놀라운 하이데거가 있다. 게다가 끝내 관대한 아렌트라니, 이들을 정리하고 존재론과 이별하고 싶다. 내 존재 이론이나 정치 철학이 그들의 것과 같을 필요는 없다. 불가능한 이별을 시도하는 중이다.


하루 종일 덤으로 얻은 건 지독한 두통,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먼 하늘을 보거나 눈을 감는 게 낫다. 글자들이 눈 안에 가득 차서 머리를 흔든다. 오늘 이 두통과 이별하러 영화관에 갔다가 더 큰 무게의 고뇌를 안고 돌아왔다. 대체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 진한 여운에 오늘의 마지막 프로이별주를 고르러 간다.



▣ 영화 추천: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 (Baka's Identity)' by 나가타 코토 감독, 2026, 스릴러 &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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