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보여준 나옥분 할머니의 삶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장을 누비고 다니는 나옥분 할머니의 넘어질 듯 바쁜 걸음이 화면 가득 잡힌다
시장을 누비고 다니는 옥분 할머니의 넘어질 듯 바쁜 걸음이 화면 가득 잡힌다. 나문희 배우가 연기하는 걸음걸이는 너무나 익숙하고 정겹다. 바쁘지만 빠르지는 못한 걸음으로 온 동네를 누비고 다니는 옥분 할머니.
도깨비 할머니로 불리는 옥분 할머니는 할 말이 정말 많다. 시장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해결해야만 적성이 풀리는 듯하다. 그래서 공무원들을 괴롭히는 자잘한 민원 처리 업무들을 매일 한 보따리씩 안고 구청을 방문한다.
걱정도 많고 정도 많고, 그래서 오지랖도 넓은 그녀. 그런데 이제 그것도 모자라서 영어까지 꼭 배우겠다고 한다.
그녀의 사연을 이미 들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영화 초반에는 왜 그렇게 영어를 배우려 하는지 정확한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 어설픈 열정과 함께 다소 코믹한 상황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유 없는 열정은 없을 터. 어떤 열정이 발현하는 순간에는 몇 가지 이유가 동시에 작동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몇 가지 이유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진짜'가 숨어있다. 그걸 본인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말이다.
영화 속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정에도 몇 이유들이 섞여 있었다.
첫째 이유. 오래전 헤어져 지금은 미국에 있는 남동생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둘째 이유. 온전한 기억을 점점 잃고 있는 그녀의 친구를 위해서 언젠가 해야 할 일 때문이다.
그 둘째 이유는 그녀가 애써 외면해왔던, 알고는 있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던 이유이고.
여기서 그녀가 '친구를 위해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꽤 중요하다. 이것은 <아이캔 스피크>가 호평받는 지점, 위안부 피해자를 전형적으로 그리지 않을 수 있었던 상상력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외면하고 묻어두려 했던 일이지만, 절대 잊을 수는 없는 경험을 친구를 위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친구를 위한 일이지만 결국 그녀를 위한 일이기도 한 일. 같은 피해 경험으로 연결된 이들이 서로를 위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일은 가해자(들)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일 것이다.
피해자들의 경험은 개별적이지만 보편적이다. 피해 생존자의 경험들은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을 특수하게 만들지만, 보편적으로도 만든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서사는 그 둘의 복잡하고 미묘한 공존을 얼마나 잘 풀어내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캔 스피크>는 주인공의 피해 경험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편이다.
자신이 피해자였음을 말하기로 결정한 직후 어머니의 무덤에 찾아가 울며 원망하는 장면, 자신을 애타게 찾는 누나를 외면하는 남동생 등. 현재의 김옥분 씨가 있기까지의 다난하고 자잘한 삶의 상처들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다른 영화들에서 자주 지적되는 피해 당시의 재현은 크게 하지 않으면서도, 오랜 시간 동안 그녀에게 가해진 상처와 피해를 관객들이 자연스레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리베카 솔닛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종 여성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대한 폭력이다'라고 했다.
나옥분 할머니의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고, 자격이 없다고 소리치던 이들.
피해 사실을 숨기고 묻고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던 주변 인들.
그리고 불편한 이야기들을 쉽게 외면하며 듣고자 하지 않으려 했던 이들.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억압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할 말은 다 하고, 소리칠 일도 많은 당당한 그녀에게도
못다 한 말,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용기를 냈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자신의 진짜 이유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이 아리고, 눈물을 흘렸다면.
이제 영화를 본 우리가 할 일은 숨겨야 했던 이야기를 피하지 않고 들어주는 일,
그리고 영화 속 민재(이제훈)가 그랬듯 '미안하다'고 말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