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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Oct 01. 2018

안녕, 처음 만나는 나의 앤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 속 새로운 앤 셜리를 만나다

* 넷플릭스 시리즈 <빨간 머리 앤; Anne with an E>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Anne with an E' ⓒNetflix (2017)



간절한 상상으로 기다린 순간들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으로 숨이 차게 쏟아 내고 싶은 단어들이 가득한 소녀 앤 셜리. 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들어야만 열리지 않는 낡은 가방을 들고 긴장한 채 기차역에 앉아 고대하던 새로운 가족을 기다린다. 그런 앤을 만나고 매슈 커스버트는 실은 남자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었으므로 당황한다. 앤을 기차역에 홀로 둘 수 없기에 하는 수 없이 함께 집으로 가는 길, 매슈는 끝없이 새로운 단어들을 쏟아내는 앤이 신기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겐 별다를 것도 없는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에 앤이 끊임없이 아름다운 찬사를 쏟아내고 있기 때문. 앤은 그 길에서 만나는 꽃길과 연못에 '환희의 하얀 길'과 '반짝이는 물결의 호수'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며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제 상상력으로 멋지게 만들 필요가 없는 곳은 처음 봤어요!

여기까지는 아마도 익숙한, 상상력이 풍부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생기발랄한 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넷플릭스의 앤은 '빨간 머리 앤' 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이미지인 일본 애니메이션 속 따스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앤은 자꾸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곤 굳어 버린다. 이내 애써 웃으며 조잘거리는 앤은 안간힘으로 어떤 기억들을 잊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 앤이 자주 쓰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상상력'이다. 그녀는 힘든 시기를 겪었다. 보육원에서의 괴롭힘, 입양 가정에서의 폭력적인 생활, 아직 어린 앤은 여태 조건 없는 애정을 받아본 적 없다. 그래서 늘 그것을 상상해야만 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하고 싶은 넘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귀를, 아늑하고 마음이 놓이는 집과 가족을. 앤에게 과거의 기억은 늘 어두운 회색빛이고 그녀를 얼어붙게 만드는 트라우마다. 당연하게도 기억보다는 상상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앤. 그래서 상상력을 넓혀주는 책들을 몰래 읽고 외우고 어려운 단어들까지 그대로 흡수한다. 앤에게 그건 불가피한 선택이고 자연스러운 성향 이건만, 남다른 앤의 상상력과 단어들은 그녀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주 미움을 받는다. 



상상력이 부족한 이들의 폭력 속에서

앤과 달리 상상력이 부족한 이들은 조금은 다르게 살거나 살아온 사람들을 함부로 평가하고 배척한다. 앤을 처음 보자마자 욕하고 함부로 대하는 애번리의 많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들의 상상력은 앤의 상처나 가능성을 알아봐 줄 정도가 되지 못했다. 마음 둘 곳 없는 학교에서 울며 뛰쳐나온 앤은 자신의 아지트에 숨는다. 그곳에서 상상의 친구와 이야기하고, 코딜리어 공주 놀이를 하며 스스로의 세계에 틀어 박히는 장면들은 앤의 상상력이 현실에 닿지 못할 때의 홀로 고립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앤은 스스로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용기 있고 강인한 내면을 가졌다. 그녀는 트라우마에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마을에 큰 불이 났을 때, 보육원에서 읽을거리가 없어 읽고 외웠던 화재 대피 요령을 떠올리는 앤의 모습은 상징적이다. 분명 그녀의 과거엔 상처와 어둠이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 견뎌낸 시간들은 현재 앤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앤은 천천히 과거로부터의 기억들을 스스로 선택하며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어 갈 준비를 한다. 그리고 그녀의 곁엔 애정 어린 마릴라와 매슈가 함께 한다.


비극적인 가족사로 인해 그린게이블에서 몇십 년을 함께 의지하며 살아온 커스버트 남매는 실수로 입양한 앤으로 인해 큰 변화를 겪는다. 매슈와 마릴라는 그녀를 키울지 말지 고민하던 기간, 의심하고 불안해하던 기간을 지나 그 변화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음 깊이 그녀를 받아들인 이후엔 누구보다 따뜻하고 온전한 사랑과 보호를 앤에게 준다. 넉넉한 보호를 받으며 현실에 발 딛고 선 앤의 상상력은 더 이상 홀로 고립되지 않고, 또 다른 누군가를 구원한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매슈와 마릴라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 콜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지하고 예술성을 발휘하는 것, 다이애나와 루비가 글쓰기 모임을 만들며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것. 이 모든 순간들에서 앤의 영향력은 점점 더 빛나며 커진다.



안녕, 처음 만나는 나의 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보는 시청자들 또한 앤에게서 많은 영감들을 받게 된다. 새로운 시리즈는 앤이 겪는 지독한 편견과 트라우마 같은 개인적인 에피소드들부터 19세기 페미니즘 초창기의 장면들과 결혼 관념, 성소수자, 유색인종 차별 등 사회적인 문제들까지 넓고 깊게 다루고 있다. 이런 다양한 주제들은 현실에서도 여전히 완벽히 해소되지 않았으므로, 유의미하다. 


한편, 이만큼이나 새로운 앤을 초반엔 외면하는 시선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이 공개된 직후 SNS에선 #notmyanne(나의 앤이 아니야)라는 해시태그가 쏟아지기도 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되었을 앤의 현실적인 트라우마라던가, 시대의 어두운 배경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그만큼 원작을 아끼는 팬들이 얼마나 많은가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난 어렴풋이 기억나는 원작 또는 애니메이션의 따뜻한 그림체보다도, 새로운 앤과 더 큰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보고 있으면 나의 마음까지 한없이 떨어트릴 정도로 버거운 이야기를 들려주다 이내 다시 용기를 품게 만든다. 시즌2가 끝날 무렵엔 앤의 삶에 또 다른 큰 변화를 일으켜 줄 트레이시 선생님이 멋지게 등장한다. 다음 시즌에선 앤이 어떻게 성장하며 내게 어떤 영감을 주게 될까. 현재도 여전히 의미 있는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을 가득 안고 달려올 나의 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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