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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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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멈춰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우거진 푸른 숲에 잎이 돋아나지 않고, 물이 고인 웅덩이가 마르지 않고, 물안개에 피어난 무지개가 사시사철 흐트럼이 없고, 하늘에서 쏟아져내린 바닥의 총알들이 녹슬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이 낡지 않고 그대로 깨끗함을 유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구름은 움직이지 않고 꽈배기 나무는 베어도 없어지지 않고 처음 상태를 늘 유지한다. 샘물은 마르지 않고 어린이는 자라지 않는다. 무인도는 언제나 변함없이 밝고 반짝였고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세상 만물이 최상의 상태에서 영원히 박제된 듯한 이곳 무인도는, 가장 찬란했던 삶의 순간이 시간이 붙잡힌 채 이미지로 기록되어버린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찬란함은 영원할 것인가. 그림 속에 박제된 불멸의 행복은 변함없이 지속될 것인가. 영원한 행복이란 가능한가. 영원함은 기록의 형태로 보존되며 기록은 죽음의 형태를 지닌다고 하니, 영원함이 깃든 이곳은 죽음의 공간인 걸까.
“나는 이미 죽었는지도 몰라.”
꽈배기 나무 밑에서 본인의 애착담요에 싸인 채, 아기가 되어 울고 있던 정범을 발견한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유니콘은 수백번도 날아와 무지개 방귀를 뀌었고 그때마다 샘물을 수도 없이 마셨으니까. 시계만 없을 뿐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은 흐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늘 똑같은 풍경에 모든 것들은 멈춰있었고, 정범이는 아무리 먹여도 자라나지 않았다. 자라지 않은 것은 준원도 마찬가지였다. 표류한 지 수개월, 아니, 수년이 흘렀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동안 한 번도 손톱을 깎거나 머리를 잘라본 적은 없었다.
준원은 이 변함없는 영원함이 무서워졌다. 나는 과연 살아있는 것이 맞는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시도때도 없이 우는 저 성장하지 않는 아기를 보며 깊은 실의에 빠질 때가 많았다. 오늘도 정범의 울음소리에 차마 발을 뗄 수가 없었지만, 준원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앞날을 예견하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울고 있는 정범의 앞에 온갖 과자, 빵, 과일들을 수북이 쌓아주고는, 마음이 약해질세라 서둘러 정범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날 하빈과의 재회는, 준원의 삶에 큰 변곡점이 되었다.
다시 만난 하빈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앙상한 뼈가 다 보일 정도로 더욱 마른 하빈을 준원은 처음엔 몰라봤었다. 준원을 보자 냅다 소리를 질렀던 하빈만 아니었다면, 나뭇잎을 보호색처럼 온몸에 뒤집어쓴 하빈을 그냥 지나쳤을 준원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 나 집에 갈 거야!”
갑작스럽게 고막을 때린 째지는 음성에 준원은 놀랐다. 목소리가 앙칼졌던 것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꽤나 반가운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하빈? 하빈이야? 야! 너 그동안 어디 있었어?!”
이 좁디좁은 무인도에서 그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채 감쪽같이 실종되었던 하빈이었다.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무인도에 만약 시간이란 게 흐르고 있다면, 백만년만에 하빈이 나타났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동안 얼마나 찾았는데!”
준원이 반가워하며 하빈에게 다가가자,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치는 하빈이다. 하빈은 매서운 눈빛으로 준원을 쏘아보며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오빠도 한 팀이야? 왜 정범이가 오빠랑 같이 있어?”
준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걔가 정범인지 어떻게 알았어?”
“왜 몰라?!내가 다 봤으니까 알지!”
“다 봤다고?”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내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그 때 있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하빈이다. 하빈을 다시 만난 반가움은 잠시 묻어두고, 심각해진 얼굴로 하빈의 어깨를 잡았다.
“내 동생이잖아. 내 동생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아니면, 누구야? 뭐야? 쟤 갑자기 왜 저렇게 변했어?”
하빈의 몸이 심하게 떨린다. 눈물 가득한 채 준원을 올려다보는 하빈의 눈동자도 같이 떨리고 있다.
“오빠, 너무 무서웠어.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데?”
“범석 오빠가, 정범이한테 샘물을 엄청 많이 먹였어.”
“.......?!”
“정범이가 먹기 싫다고 계속 말했는데, 범석오빠가 정범이를 묶어놓고 억지로 물을 입에 부었어. 통이 엄청 컸는데, 그 통 다 먹으니까 갑자기 정범이가 아기가 됐어.”
“...아니... 왜.......?”
“몰라. 샘물을 안 먹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왜 우리가 그걸 꼭 먹어야 해? 우리도 먹기 싫으면 안 먹을 수 있는 거잖아.”
북받친 하빈은 몸을 들썩이면서 울었다. 하빈이 하는 말들에 준원은 한동안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좀 배고파서 우리가 가져온 과자랑 음료수랑 그런 거 좀 먹었다! 그게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잘못한 일이야? 그냥 요즘 너무 배고파서 먹다 보니 없어진 건데, 범석 오빠가 규칙을 어기고 도둑질했다고 우리보고 벌을 받아야 한대. 그런데 그거 우리 거잖아. 우리가 가져온 거 배고파서 먹은 건데. 그게 왜 도둑질이야. 오빠들이 안 먹은 거잖아.”
“그러니까, 너희가 도둑질을 해서, 그 벌로 쟤가 샘물을 많이 먹어서 저렇게 된 거라고?”
“..다음은 내 차례였어. 그런데 내가 거기서 도망쳤거든. 범석오빠가 나를 찾고 있을거야. 무서워.”
그날 있었던 일을 준원은 두고두고 기억한다. 아버지의 정체를, 그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끝내 찾고서 자신의 눈을 찔러버렸던 오이디푸스처럼. 준원에게 한순간에 불어닥친 이 사건들은 앞으로 준원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므로.
하빈과 헤어지고, 즉시 준원은 범석을 찾아나섰다. 그제야 승혁이 준원에게 했던 모든 말과 표정들이 이해가 되었다. 작정하고 숨어버린 승혁과는 달리, 범석은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범석은 어디 넙적한 돌에 걸터앉아 작은 접이식 칼을 펼쳐서 칼을 갈고 있었다. 준원이 다가가 냅다 뒤통수를 갈겼다. 범석이 뒤통수를 감싸며 놀람과 짜증이 뒤섞인 표정으로 뒤돌아보자, 준원은 범석이 가지고 있던 칼을 빼앗아 얼굴을 길게 그었다. 범석이 소리를 지르며 피나는 얼굴을 감씨쥐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준원을 쳐다보았다. 밧줄로 범석의 몸을 질끈 묶은 준원은, 샘물이 가득한 커다란 통으로 끌고 가 범석을 그대로 빠뜨렸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숨가쁜 소리가 들렸다. 몇시간 즈음 흘렀을까. 통 안에서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기이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준원은 눈을 감았다. 꽈배기 나무 숲에서 아기가 되어 울고 있던 정범을 처음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렸고, 준원의 만류에도 무작정 샘물에 뛰어들었던 하빈을 떠올렸고, 그 주변으로 거품이 일다가 점차 파란 돌멩이로 변해갔던 하빈을 떠올렸고, 샘물 주변에 있었던 무수한 파란 돌멩이들까지 죄다 떠올리다 보니, 어느덧 준원에게 한 가지 중요한 결심이 들어섰다.
두고두고 기억되는 중요한 날이었다.
준원은 그날의 충격과 공포를 눈을 감고 되뇌고 있다. 그날 하빈이 뛰어내렸던 바위 위에서.
준원은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한다. 이제 모든 건 다 끝났다. 이 지겨운 영원의 굴레에서 벗어날 거다. 죽음과도 같았던 무인도를 탈출하고자 한다. 허망함 가득한 눈으로 샘물을 잠시 보던 준원은 그대로 눈을 감고 샘물로 뛰어들었다. 힘없이.
풍덩, 하는 소리.
빠르게 거품이 일어나는 샘물 소리.
어느샌가 하늘에 박혀있는 붉은 달만이, 비밀을 간직한 고요한 이방인처럼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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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우주 같은 강물이 넘실대고 있다.
캄캄한 수면으로 고층빌딩들의 조명이 비춰진다. 서울의 야경을 그대로 반사하는 검은 강물 속에서, 준원이 눈을 떴다.
한동안 준원은 일어나질 못했다. 여기는 어디인가. 하늘 높이 솟아있는 수많은 빌딩들이 있는 이곳은 또다른 죽음의 세상인가. 강물에 둥둥 떠다니며 결국 끝이란 없는 것인가 하고 준원은 생각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준원이 파란 돌멩이가 되지 않은 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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