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恐白)_3화

by HANA





3


잠이 들면, 우리의 그림자는 깨어 있을 때 간절히 생각하던 그 사람의 꿈을 찾아간다고 해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혹시 여러분의 꿈에 자주 등장하는 분이 계시나요?

어쩌면 그 분은 지금도 당신을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라디오에서 이루마의 'If I could see you again' 이 흘러나온다. 내가 이 쪽 세계에 입문하게 된 피아노곡이다.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방 한 구석에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피아노 뚜껑을 안 열은지도 거의 오 년이 다 되어간다. 거무죽죽하게 생긴 그것은 괴기스러운 이빨들을 숨긴 채 입을 굳게 다물고 나를 원망하는 것만 같다. 오 년 전, 피아노 콘테스트에서 난 피아노를 앞에 두고 처음으로 알 수 없는 공포감에 포위됐다. 평소대로 선율을 타고 나의 공간을 자유롭게 누비며 관객석의 구석구석을 감동으로 가득 채워주면 되는 건데, 그날따라 입을 벌린 피아노는 무시무시한 괴물처럼 보였다. 눈부시게 하얗기만 한 건반들에게서 입 냄새가 풍겨 나왔고, 내 머릿속은 백지가 되었다. 정신이 헤롱한 상태에서 나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애타게 관객석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꽉 끼어 좁아 터지는 관객석은 숨 막힐 듯이 내 목을 조여 왔고, 금방이라도 와르르 쏟아져 나를 덮칠 것만 같아서 눈을 감았다. 공간들이 겹치고 겹쳐 하염없이 영원한 시간이 뽑아져 흐르는 그 곳엔 빈틈이 없었다. 결국 누나는 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피아노 뚜껑을 열지 않았다.


노트를 펼쳤다. 맨 앞장 위쪽 끄트머리에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 점 하나조차 찍혀져 있지 않는 깨끗한 백지 위에서 검은 글씨는 오히려 공포스러웠다. 오 년도 넘는 긴 시간동안 한 자리에서 꿈틀거렸을 그 글씨는 공백에 갇힌 채, 노트를 펼칠 때마다 항상 변함없이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금방 올게. 피아노 연습하고 있어. - 누나가


누나는 하얀 색을 좋아했다. 하얀 지갑에, 하얀 반지, 하얀 다이어리 등 누나가 가진 것들은 온통 하얀 색이었다. 그 날도 누나는 분명 하얀 원피스에 하얀 백을 어깨에 걸고 하얀색 힐을 딸각거리며 집을 나갔을 것이다. 누나가 무슨 조선시대 백의민족이냐고 항상 뭐라고 하던 나였지만, 어린 시절 하얗게만 빛나던 누나는 내게 천사와 다름없었다. 피로 흥건했을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며 울던 엄마가 무서웠고, 경찰 아저씨들이 엄마의 손을 묶고 어디론가 데려가자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계속 뒤를 바라보며 눈물을 쏟아내는 엄마를 떠나보내고, 누나의 손을 잡고 경찰서를 나와서 내가 처음한 말은. 엄마. 누나를 보고 그렇게 말하며 울었다. 그 뒤로 다시는 엄마를 보지 못했다. 그 때부터 누나는 나에게 피아노를 쳐주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징징거릴 때마다 이루마의 'If I could see you again' 을 치며 나를 달래주던 누나는 무척 아름다웠다. 사실, 난 엄마가 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엄마를 볼 수 없게 되어 오히려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단지 피아노를 치는 누나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누나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나는 왠지 모를 허전함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누나 난 나중에 커서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될 거야. If I could see you again. 밤새도록 연습했다. 그날따라 주변을 감도는 섬뜩함을 떨치려 누나의 하얀 피아노를 열심히 두드려댔다. 누나가 돌아오기도 전에 피아노는 망가졌다. 새로 바꾼 검은 피아노가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이빨을 날름거릴 때까지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라디오를 껐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음악이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 음악이 나에게 다시 공포를 던져 줄까봐 두렵다. 방안을 가득 채우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텅 빈 공간이 갑작스럽게 나를 맞이한다. 그토록 찾아다니던 빈틈이다. 그래, 이게 좋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 거야. 텅 빈 게 좋아. 당분간 저 검은 피아노도 치워야겠어.


빈틈을 찾아 사라지던 그 여자가 떠오른다. 그 누구와도 거리를 좁히지 않는 그녀는 당당하게, 하지만 최대한 웅크리고 사람들 속을 걸었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들킬까봐 두려운 듯 그녀는 자꾸 세상에 발을 디디는 공간을 작게만 좁혀갔다. 사람들 속에서 점점 작아져만 가는 그녀의 공간 속에는 과연 뭐가 있는 걸까. 뭐가 있길래 아무도 그 공간 속으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 자신만 꿈에 젖은 눈빛으로 간직하는 것일까. 그녀의 얼굴은 항상 긴 머리에 가려져 있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언뜻 비춰진 그녀의 얼굴은 어디 아픈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창백했다. 하얗게 칠한 그녀의 손톱을 보면서 피아노를 잘 칠 것만 같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자 그녀의 점점 작아져가는 공간이 궁금해졌다. 폭설이 모든 걸 덮어버린 고요한 새벽의 거리처럼 그렇게 하얄 것만 같다.


오늘 채플이 끝나고 그녀를 봤었다. 강의실이 아닌 곳에서 그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어 그녀를 쫓아갔다. 이 더운 여름날, 그녀는 긴 청바지를 입고, 위에는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덥지도 않나. 시간까지 초월한 듯한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핫팬츠를 뚫고 나온 하얀 다리들이 엉켜 제 갈 길을 찾아가고 있었고, 그 중에서 파란 청바지의 그녀 다리는 단연 돋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한 쪽 다리를 절고 있는 그녀에게 그림자가 착 달라붙어 있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그녀에게 내리꽂는 햇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공간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가 매점에 들러 김밥과 커피를 사고, 버스정류장에서 뒤엉킨 이어폰을 풀고, 80번 버스를 타고 떠나고 나서야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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