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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May 26. 2023

모든 틀은 일시적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고, 우리는 오랫동안 그 비유를 이해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중이지만, 당시 예수의 청자는 다는 아니지만 (말하고 묻고 또 답하며) 그 비유를 어느 정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의 청자들에게 예수가 '주'되심과 그가 전한 말들을 이방인에게 전할 때는 비유가 아닌 '개념', (이를 '신학' 용어라 할까!)을 사용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전한 예수와 이해하기 위해 애쓴 바울이, 역시 예수와 그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기 힘든 이방인들에게 전할 때는 이론으로 다가갔다. 어려운 말이 되었다.


예수는 삶을 말했고, 바울은 이론과 이론에 근거한 삶을 말했다.


삶>이론

예수>바울>신학

인간>심리학

결국

실체>이론


사람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이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개념을, 이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점차 대상을 그 이론에 가두지 못한다.

대상에 대한 이해가 늘어간다면,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세웠던   이전의 개념을, 이론을 수정 해체하며 그보다 더 큰 이해의 틀, 역시 개념 ㆍ이론을 도입한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그 개념 혹은 이론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거다.


예수는 이론을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비유로 삶을 전했고 그 삶을 보여주셨다.


<레 미제라블>을 읽고 있다.

성경을 읽는 것 같다. 인간을 읽고, 세상과 삶을 읽고 있다.

좁은 인간론과 신론의 유용했고 지금도 어떤 이에게는 유용하지만, 예수와 그 삶을 다 보여주기엔 어쩌면 작은 테두리를 허물고 있다.


사진은 대상에 집중하게 해주는 테두리, 틀!

무한을 틀에 담을 수 있을까!

점점 큰 틀이 필요할 것이며,

마침내 틀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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