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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Jun 13. 2023

<레 미제라블> 읽기 1

올바른 사람

1. 올바른 사람은 누구인가?      


미리엘씨는 1815년 디뉴의 주교였고, 그는 이미 75세였다. 루이 15세 왕정 시대인 1740년에 출생해, 작품이 시작하는 1815년까지 역사의 격변기를 통과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야기는 크게 1789년 프랑스대혁명, 1793년의 공포정치, 단두대와 수많은 피 흘림, 나폴레옹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리엘은 더없이 숭고한 인격을 가졌지만,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1793년에 대한 매우 강하고 특별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가 주교가 된 것은 우연히 처음 나폴레옹을 만났을 때, “폐하는 한 노인을 보고 계시옵고, 저는 한 영웅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제각기 얻는 바가 있는 셈입니다.”라고 말한 인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이 1804년 12월 2일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1813년 이후에서야 나폴레옹에 대한 모든 반대 운동에 찬성하고 갈채를 보냈다는 것(92)을 생각할 때, 그는 나폴레옹이 몰락하기 이전까지, 그러니까 황제로 등극한 이후를 포함 그의 독재조차 지지한 것 같다.


위고는 미리엘 신부 이야기를 길고도 아주 꼼꼼하게 기록한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 주거하는 집, 수입과 소비방식, 그가 입는 곳, 만나는 사람, 그가 한 말과 생활습관 등등. 거의 빼놓은 것이 없이. 그렇게까지 해서 위고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가 1881년 미리 작성해놓은 유언장에 그 힌트가 보인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 (...) 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위고는 <레 미제라블>이라는 책으로 기독교와 가톨릭과 왕을 제거한 프랑스대혁명 이후, 퇴색한 혁명의 의미를 되살리고, 거짓 종교인들로 인해 반종교적 사상과 무신론자가 확산하는 시대에 진정한 종교인의 참 신앙이 세상을 구원할 희망임을 보여주려고 한 것 아닐까. 1845-1862 무려 17년에 걸쳐 작품이 완성되는 동안, 그는 시작은 되었으나 완성되지 않은 혁명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하여 그는 작품을 완성한 날로 여겨지는 1862년 1월 1일, 작품 맨 앞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을 것이다.     


“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의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계급에 사회적 질식이 가능한 한,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더욱 넓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1862년 1월 1일, 오트빌 하우스에서     


위고는 당시 주교관, 주교가 누리는 사치, 그거들을 거부한 미리엘 신부의 구체적인 삶, 사랑, 그리고 무신론자인 상원의원과의 대화, 그의 실제와 달리 왜곡되게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던, 과거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G와의 만남으로 거짓 종교, 무신론, 진정한 신앙과 종교가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고 몰 수 있다. 그리하여 위고는 진정한 종교인을 올바른 사람이라 하고, 진정한 종교인이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완성되어가는가를 1부 1장에서 보여주고, 앞으로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이 진정한 종교인의 양심(양심은 우리가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타고난 학문의 양-76)과 거기에 기초한 책임, 즉 사랑하는 삶이 어떻게 서서히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하게 되는지 그 길고 긴 여정을 보여줄 것이다. 무산계급이기에 추락한 남성을, 타락한 여성을, 암흑 속에 갇힌 어린아이를. 무지와 빈곤을.


잘못된 것을 거부하는 주교 미리엘의 양심, 사랑

그는 누이동생 바티스틴과 하인 마글루아 부인과 함께 지냈다. 그런 그가 디뉴의 주교관으로 입주했을 때의 일이다. 주교관은 1712년 웅장한 석조건물, 위풍당당하고 웅대했고, 고대 피렌체식을 따른 홍예 회랑, 넓디넓은 뜰, 정원, 회랑을 이룬 식당, 그곳 식사에 초대받은 존귀한 인물들과 그들의 초상화들이 걸려있는 곳이었다. 주교는 곁에 붙어있는 자선병원을 방문했고, 협소하고, 산책할 곳도 없고 통풍도 안 되는 자선병원과 자신의 거처를 바꿨다. “원장님 확실히 잘못이 있습니다. 당신네들은 대여섯 개의 비좁은 방에 스물여섯 명이나 있는데, 셋밖에 안 되는 우리는 육십 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 이 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 당신이 내 집에 와서 살고, 나는 당신 집에 가서 살기로 합시다. 내게 당신 집을 비워주시오. 이제 여기가 당신의 집입니다.” 그뿐이 아니다. 누이의 종신연금 500프랑, 미리엘에게 국가가 지급하는 15000프랑의 봉급은 거의 자선을 위한 예산으로 집행했다. 세 식구는 엄격한 절약으로 궁색할 정도로 최소한의 삶을 이어갔다. 언제나 곤궁한 자들이 더 많으므로 입은 옷까지 벗어주었다. 부자들로부터 받은 사례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고, 사람들은 그를 비앵브뉘(환영, 환대) 예하라 불렀다. 오직 어느 대고모로부터 상속받은 두 개의 커다란 은촛대와 옛날의 소유 중에 은 식기 여섯 벌을 사치로 갖고 있었으나, 그 은그릇을 두는 장은 잠그는 법이 없었다. 감옥 문처럼 자물쇠와 빗장이 붙어있던 식당 문에서 그런 철물을 다 뜯어 없앴고, 문은 낮이나 밤이나 걸쇠로만 닫혀있었다. 누구나 어느 때고 밀기만 하면 문은 열렸다. (47) 그는 “그대에게 숙소를 달라는 사람에게 그 이름을 묻지 마라. 스스로 이름을 밝히기 거북한 자야말로 특히 피난처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49) 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밤조차도 두려워 않는 용기가 있으며, 비가 오나 겨울이 와도, 밤이나 수상한 길을 무서워하지 않고 나쁜 놈을 만날까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65) 정신 속에 위대한 것을 지녔다. (67)     


허영을 버린 미리엘의 말과 설교

그의 설교는 어렵지 않았다. 풍부한 비유를 사용, 직접적인 요점을 전했다. (24-26)

그는 또 이런 말들을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에 있는 말 같은데, ‘유산을 받지 못할 자에게 희망을 걸어라’라는 구절을 생각하고 있었어.”, “죽음에다 칭호들을 한 짐 잔뜩 거뜬히 걸머지웠구나! 이렇게 허영을 위하여 무덤까지 사용하다니, 인간이란 참 재주도 용하지.”, “주께서는 인간에게 공기를 주셨는데, 법률은 그것을 팔아먹습니다.”(29) ”단두대는 사형집행인의 공범이다. 그것은 게걸스럽게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 (35), “인간의 법을 모를 정도로 신의 법에만 몰두하는 것은 잘못이다.” 등등. 그는 아버지가 되고 형제가 되고, 친구가 되었으며 오직 축복할 때만 주교였다. (33) 과부나 고아의 집에서는 일부러 청할 필요조차 없었다. (36) 누구든지 뭐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집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돈이 있는 동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고, 돈이 떨어지면 부자들을 찾아갔다. (39)

그러다 보니 놀라운 일도 일어났다. 산적들 일당이 지방 사람들을 괴롭히는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사람이라며, 그들이 출몰하는 지방을 찾았다. 그런데 산적이 도리어 자신들이 훔쳤던 노틀담 대성당의 이름답고 호화로운 주교복 일습을 놓고 돌아갔는데, 그 안에는 “크라바트로로부터 비앵브뉘 예하께” 라고 쓰인 쪽지가 있었다. (54)

그 대성당의 보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주교가 쓴 메모가 그가 쓴 서류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이것이 대성당으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자선병원으로 돌아가야 할지, 그것을 아는 것이 문제로다. (56)”라고 적혀 있었다.      


위대한 영혼 속의 조그만 모순 - G와의 만남

주교는 참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도 아직은 온전할 수는 없었는데 그건 무신론자, 독수리(나폴레옹파), 은둔 생활 속에서 교제하기를 싫어하고, 다만 왕의 사형에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추방자 명단에서 배제될 수 있었던 사형집행인으로 소문난, 옛 국민회의 의원 G에 대한 그의 생각과 태도였다. 주교는 그에게 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쪽으로 가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71) 그러나 그 늙은 악한이 죽어가고 있다는 거였다. 드디어 주교가 지팡이를 들었다. 주교가 찾아갔을 때, 농부용 안락의자인 바퀴 달린 낡은 의자에 앉아있는 백발노인이 해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긴 생애를 보낸 후에도 느낄 수 있는 놀라움이 모조리 나타나 있었다, (72) 그는 주교를 ‘나의 주교’라고 했다. 이때, ‘큰 어르신네’라는 경칭을 그렇게도 곧잘 비웃던 주교도 상대방이 자기를 ‘예하’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동시에 ‘동무’라고 대꾸해주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고, 생전 처음 엄격해지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야말로 위대한 영혼 속에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조그만 모순이었다. 그러나 국민회의 의원은 그동안 다정한 눈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고, 바야흐로 먼지로 돌아가려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아마 겸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어려있었다. 그는 법의 보호 밖에 있는 것 같은, 심지어 자비의 법에서도 벗어나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교에게 주었다. 혁명은 그 시대에 어울리는 이러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임종이 가까운 시간에 그는 건강한 사람의 눈초리, 확고한 어조,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 불요 불굴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는 죽기를 바라기 때문에 죽는 것 같았고, 그의 단발마에는 자유가 있었다. (75) 게다가 그의 말들은 놀라웠다.

그의 말을 옮겨본다. 인간은 하나의 폭군, 즉 무지를 갖고 있다. 그가 찬성한 것은 바로 그 폭군 즉 무지의 종말이다. 그 폭군이 왕권을 낳았다. 학문은 진리 속에서 얻은 권위라면 왕권은 허위 속에서 얻은 권력이다. 양심이란 우리가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타고난 학문의 양이다. 루이 16세의 처형에 대해 그는 반대했다. 한 인간을 죽일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악을 전멸시킬 의무는 있다고 생각했기에 폭군의 종말에 찬성했다. 그가 공화제에 찬성한 이유는, 여성에게 ‘매음의 종말’, 남성에게는 ‘노예의 종말’, 아동에게는 ‘암흑의 종말’을 위해서였다. 우애와 화합, 여명에 찬성한 거다. 편견과 오류의 붕괴를 도왔다. 오류와 편견의 붕괴는 빛을 만들어내고 낡은 세계를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비참의 도가니였던 낡은 세계는 인류 위에 나둥그러짐으로써 기쁨의 항아리가 되었다. (77)

미완성이긴 했으나, 누가 뭐래도 프랑스 혁명은 그리스도의 강림 이래, 인류의 가장 힘찬 한 걸음이었고, 숭고했다. 혁명은 모든 사회적 미지수를 끄집어냈고, 혁명은 인간의 정신을 온화하게 하고 진정시키고, 위안하고, 밝게 했다. 혁명은 지상에 문명의 물결을 흘려보냈고, 훌륭한 것이었으며, 인류의 축성식이었다. (78)

주교는 1793년의 그 학살, 루이 17세의 죽음으로 그의 생각을 부정했으나 그 의원은 다시 말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슬퍼하시오? 그가 무고한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나도 좋소. 나도 당신과 함께 슬퍼하겠소. 아니면 그가 왕자였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좀 깊이 생각해 보시오. 비적 카르투슈의 아우는 카르투슈의 아우라는 죄만으로 그레브 광장에서 양쪽 겨드랑이를 매달아 마침내 죽게 했는데, 이 무고한 어린아이의 죽음은 나에게는 오직 루이 15세의 손자라는 죄만으로 탕플 탑에서 고통스럽게 죽은 루이 15세의 무고한 어린 손자 루이 17세의 죽음 못지않게 가슴 아픈 일이오.” (79)

주교는 그 두 사람의 이름을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다시 그는 말했다. “카르투슈를 위해서요, 아니면 루이 15세를 위해서요?”

이때 주교는 여기에 온 것을 후회하면서도 이상하게 막연한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다시 그가 말했다. “아! 신부님, 당신은 노골적인 진료를 좋아하지 않는구려. 그리스도는 그걸 좋아했는데 그는 채찍을 들고 예루살렘 사원에서 간상배를 쫓아냈소. 빛이 가득한 그의 회초리야말로 노골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었소. 그가 ‘어린아이들을’ 하고 외쳤을 때 그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았소. 당신은 루이 17세의 이름을 말했소. 우리 동의합시다. 모든 무고한 사람, 모든 순교자, 모든 어린아이,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 우리는 이 모든 존재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가? 나는 동의하오. 하지만 그렇다면 아까도 말한 것처럼 1793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오. 루이 17세 이전에 우리 눈물이 시작되어야 하오. 나는 당신과 함께 어린 왕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겠소. 다만 당신이 나와 함께 민중의 어린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 준다면.” “그리고 만약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만 한다면, 민중 쪽이길 바라오. 민중은 더 오래전부터 고초를 겪어 왔으니까.”

“나는 오스트리아 황녀이자 프랑스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엾게 여기지만 나는 또한 루이 대왕 치하였던 1685년 아기에게 젖을 주다가 잡혀 허리까지 발가벗겨진 채 아기와 떨어져 말뚝에 결박되었던 저 가련한 신교도 부인도 가엾게 생각하오. 그녀의 젖가슴은 젖으로 부풀었고 가슴은 고통으로 부풀었소. 배가 고파 파리해진 아기는 그녀의 젖가슴을 보면서 괴로워하며 울부짖는데 사형집행인은 어머니요 유모인 그 부인에게 ‘개종하라!’고 말하면서 아기의 죽음과 양심의 죽음 중 양자택일을 하게 하였소. 한 어머니에게 적용된 이 탄탈로스의 처형을 당신은 어떻게 보시오? 프랑스혁명은 이유가 있었소.”(85)

교황은 그가 무신론자라고 생각했으나 실제 그는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었다.(86) 게다가 그는 조국에 충성했고, 혁명 중에도 많은 사람을 구했다. 그는 가난했지만, 국고의 금고에는 금은화가 가득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도왔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했다. 그가 제단보를 찢었지만 그건 조국의 상처에 붕대를 감기 위해서였다. 인류가 광명을 향해 전진하는 것을 도왔고 때로는 무자비한 진보에 저항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적들도 보호했던 사람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선행을 했다. (88) 그러나 그는 물러나고 쫓기고 추적당하고 박해와 중상모략과 모욕, 저주와 추방을 받았다. 많은 사람이 그를 멸시할 권리가 있다고 여겼다. 무지몽매하고 가련한 군중이 그를 천벌 받을 놈으로 보지만, 그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고독을 감수하고 있었다. (88)     

국민회의의 의원과의 결합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이 상봉은 미리엘 주교에게 일종의 경탄을 남겨주었는데 이것이 그를 더욱더 온화하게 만들었다. 이 만남으로 주교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약점을 마주하게 했다. 세금을 내고 세습제로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법관의 아들, 법관 귀족으로, 소문에 의하면 사교와 여색에 빠져있다가 1789년 바스티유 습격(1789. 7.14)과 이어진 8.26일 인권선언 이후 이탈리아으로 망명해, 멀리서 1793년의 비참을 바라봐야만 했던 그가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었던, 혁명에 대한 왜곡, 거기에 가담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그리고 이때부터 빈민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우정과 우애는 더욱 커졌다.(88)     


신학적 울타리를 걷어낸 그의 신앙과 사상, 사랑

그는 브라만교도의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동물의 혼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가?”라는 전도서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본 것 같았다. 그는 정원 산책로에서 홀로 자기 자신과 마주하며 명상에 잠기고 편안한 마음으로 주를 예찬하고, 자기 마음의 맑음을 정기의 맑음에 견주고, 어둠 속에서 눈에 보이는 별자리의 광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의 광채에 감격하며, ‘미지의 것’에서 내려오는 생각들에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이었다. (106) 그는 불가해한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주를 연구하지 않았으며, 주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원자들의 그 놀라운 만남을 고찰하고 있었다. 물질에 외관을 주고, 함을 확인하면서 그 힘을 나타내고 통일 속에 개성을, 넓이 속에 균형을, 무한 속에 무수를 만들어내고 빛으로 아름다움을 낳는 원자들의 만남을. 만남들은 끊임없이 맺었다가 풀어진다. 이로 말미암아 생과 사가 생겨난다. (107) 그에게 산책하기 위해서는 작은 정원이 있고, 명상에 잠기기 위해서는 무한한 하늘이 있다. 발아래에는 가꾸고 거둘 수 있는 것이 있고, 머리 위에는 연구하고 명상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며 땅 위에는 몇 송이의 꽃이, 하늘에는 그 모든 별이 있다. (108) 현재 유행하는 표현을 써서 말하자면, 디뉴 주교에게 어떤 ‘범신론자적인’ 모습을 부여할 수 있고, 그에 대한 비난이 될지 칭찬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이따금 고독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싹트고 형성되어 종교를 대신할 정도까지 자라는 우리 시대 특유의 그 개인 철학 중 하나를 그가 품고 있었다고 믿게 할 수 있을 것이므로, 비앵브뉘 예하를 실제로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 하나 그러한 생각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람을 비춰 주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의 지혜는 거기서 나오는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체계적 사상은 전혀 없고 행위는 많다. (108)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주교라고 말하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도덕적 인격에 관해 내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소. (…) 당신은 주교요. 다시 말해서 성당의 수장이요 금실로 짠 옷을 입고, 휘장을 달고, 연금을 받고, 막대한 봉급을 받는 그런 사람 중 하나요. 디뉴의 주교직으로 말하자면 1만 5000프랑의 고정 수입과 1만 프랑의 임시수입, 모두 합하여 2만 5,000프랑의 수입이 있소. 수많은 조리사와 하인들이 있고, 산해진미를 먹고, 금요일이면 뜸부기를 먹고, 앞뒤에 하인을 거느린 채 화려하게 꾸민 사륜마차를 거들먹거리며 몰고, 그런 사람 중 하나요. 당신은 고위성직자요. 연금, 저택, 마차, 하인, 진수성찬, 생활의 모든 쾌락,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처럼 소유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향락하는데, (…) 당신 자신의 고유한 가치, 본질적 가치에 관해 그것은 나에게 진상을 알려 주지 않소.”(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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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레 미제라블을 읽게 되었는가?

난생처음 하게 된 9박 10일간의 서유럽 여행 일정 중 딱 하루 중 단 몇 시간 때문이었다. 타고 가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가 그린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야기를 했다. 파란색, 붉은색, 그리고 흰색의 의미를. 그림 속 프랑스 국기를 들고 있는 여성 옆의 아이가 훗날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을 집필할 때 가브로슈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그때 위고가 생각났다. 그리고 얼마 후 루부르 박물관에서 바로 그 260*325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레 미제라블>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나 역시 여행이라는 기회,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그의 말. 결국, 만남이 내가 책을 들게 하고 무지에서 구원받게 했다. 이 책은 무려 65000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리엘 신부는 실존 인물인, (자크 샤스탕 선교사를 한국에 보낸) 미올리스 신부가 그 모델이었다고 한다. (숙대신보(http://news.sookmyung.ac.kr 참고)

누구와 만나는가가 사람의 가는 길을 바꾸고 계속해서 바꿔나간다. 미리엘 신부가 역사와 사람을 만나 완성을 향해 변화되었으며, 미리엘 신부 곁에 있거나 만나는 사람들이 그리될 것이다. 날마다 아주 조금씩 완성을 향해 변화해가는 우리로 인해 또한 그리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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