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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Jul 12. 2023

레미제라블 읽고 쓰기

워털루와 군함 오리옹/전재, 법, 언론

<레미제라블> 읽고 쓰기

■전쟁이란 무엇인가!

독립을 위한 전쟁을 제외하고, 전쟁은 폭력에 불과하다.

죽고, 죽이고, 죽는다. 그곳에서 사람의 살이 반죽이 될 뿐이다.

연기를 뿜는 피, 넘쳐나는 묘지들,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들이 있을 뿐이다. 민중을 위한 전쟁이란 없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어떤 승전 후에는 야만적인 국민들이 생긴다. 소나기로 불은 일시적인 허영이다.  인류의 명예, 품격, 문화, 천재적 재능은 저 노름꾼인 영웅들과 정복자들이 전쟁이라는 제비뽑기에 걸 수 있는 번호가 아니다. 흔히 전투에는 패하되 발전을 획득한다. 영광은 줄되 자유는 많아진다. 북소리는 사라지되 이성은 입을 연다. 전쟁은 지는 자가 이기는 노름이다.  

전쟁이란 그럴듯한 거짓 명분을 제공하는 이류, 아니 삼류 그룹이  일류를 끌어들여 소모시키는 것이다.  군대가 하는 일은 모두 폭력을 쓴다. 맹목적 복종이란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군대라는 것은 결합의 신기한 걸작이 어서 무능의 막대한 합계에서 힘이 생겨난다. 인류에 의하여, 인류의 대하여, 인류의 뜻에 반하여 행해지는 전쟁은 그렇게 설명이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 죽어 가는 동안 수없이   대포와 총을 쏴대고, 국가 예산 30퍼센트 이상을 소비한다. 전쟁을 위한 준비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워털루 전쟁에서 가장 위대한 이는 누구인가!

죽은 병사들의 수에는 무관심한, 승리만을 총계로 중요시하는 국가도 장군도 아니라, 이름없이 죽어간 병사들뿐.

 

"용감한 프랑스 병사들이여, 항복해라!" 캉브론이 대답했다. "아니 똥 먹어라!" <레미제라블> 72.


자기를 죽이는 천둥에 그러한 말로써 벼락을 치는 것. 그것은 곧 이기는 것이다. 파국에 대해 그런 대답을 하고, 운명에 대해 그런 말을 하고, 미래의 사자상에 그 터전을 주고, 간밤의 비에 대해, 우고몽의 음험한 성벽에 대해, 오앵의 움푹 팬 길에 대해, 그루시의 합류 지연에 대해, 블뤼허의 도착에 대해 그런 말대꾸를 던지고 무덤 속에서 익살을 부리고, 사람이 쓰러진 뒤에도 서 있도록 하고, 유럽의 동맹을 두세 마디의 말 속에 빠뜨려 죽이고, 이미 황제들에게 알려져 있는 그 변소들을 왕들에게 바치고, 프랑스의 섬광을 거기에 섞음으로써 최하의 말을 최상의 말로 만들고, 참회의 화요일로 거만하게 워털루의 막을 내리고, 라블레(신랄한 해학과 풍자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로 레오디다스(300명 군사로 페르노필레를 지키다가 페르시아군의 패해 죽은 스파르타의 왕)를 보충하고, 입 밖에 낼 수 없는 최고의 한마디 말 속에 그 승리를 요약하고, 진지를 잃고도 역사를 간직하고, 그러한 살육 후에도 적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니, 그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것은 벼락(그럴듯한 전쟁과 승리)에 대한 모욕이다. 72-73.


이 캉브론은, 이 마지막 시간을 지나가는 사나이는, 이 무명의 전사는, 이 전쟁의 극히 미미한 존재는 거기에 거짓이 있다는 것을, 파국 속에 거짓이 있다는 것을 더욱 비통하게 느낀다. 그러면서 그가 격분할 때에, 적은 그에게 그 조롱을, 생명을 준다! 어찌 펄쩍 뛰어오르지 않겠는가? 74.


나폴레옹은 분쇄되었다. 이제 킹브론 캉 브론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제 항의할 것이라곤 그 지렁이 뿐이다. 그는 항의하리라. 그때 그는 검을 찾듯이 한 마디 말을 찾는다. 그의 입에서 거품이 나오는데 이 거품 그것이 그 말이다. 경이롭고도 보잘 것 없는 승리 앞에서,

승리자 없는 승리 앞에서, 이 절망한 자는 감연히 일어선다. 그는 이 승리의 엄청남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만, 그것의 허망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에 침을 뱉는 것보다도 더한 일을 한다. 그리고 수와 힘과 물질에 짓눌리면서 마음에서 하나의 표현을, 배설물을 찾아낸다. 되풀이하여 말하거니와, 그것을 외치고 그것을 행하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엄숙한 심판의 정신이 그 숙명적인 순간에 이 무명인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하늘의 영기가 찾아와서 캉브론은 워털루의 말을 발견한다. 그 거창한 경멸의 말을 캉브론은 단지 제국의 이름으로 유럽에 던지는 것만이 아니다. 그건 대단한게 아닐 것이다. 그는 그것을 혁명의 이름으로 과거에 던진다. 75


"아나. 똥먹어라!"


******


전쟁을 불사하고 북한과 맞선다?

그건 거짓이고,

그건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결코!


<레미제라블>은 엄청나게 팔려나갔지만, 빅토르 위고는 비난과 시기에 시달렸다.


오늘 전쟁 반대론자들 또한 전쟁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놈들의 비난을 받는다.


■법과 언론은 왜 존재하는가!

<백기>와 <파리일보>가 24601호 9430호가 된 장발장을 다뤘다. 그 기사가 참 대조적이다. 전자는 비교적 공정하고, 후자는 그야말로 매우 악의적으로 거짓 내용이 첨가되어있다. 한편 어떤 신문은 (아마 장발장이 몽트뢰유쉬르메르에서 종교적 관례를 제대로 따랐다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건에 대해 신부파의 승리라고 하였다. 어디서도 그의 숭고한 행위, 특히 샹마티외 사건에서 있었던 그의 숭고한 행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지난날의 사적을 인정하고, 공정치 못한 법의 잣대로 그를 지나치게 추락시키지만 않았더라면, 그도, 몽트뢰유쉬르메르도, 그리고 가엾은 팡틴과 그의 코제트도 그렇게 추락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법은 그들의 구체적인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법이란 그렇게 작동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병든 배에서 선원이 돛대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장발장은 목숨을 건 위험한 모험을 해 선원을 구했다. 아무도 하지 않은 모험으로. 그가 다시 노역에 종사하기 위해 내려오다가 주춤거렸다. 그리고 곧장 바다에 떨어졌다. 그 옆에 군함 알 제지라호가 정박해 있었고, 죄수는 그 두 군함 사이에 떨어졌다. 그는 둘 중 한쪽 배 밑으로 쓸려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 사나이는 사라졌다. (125). 장발장은 불의한 법 앞에서 다시, 모험했다.


"1823년 11월 17일 어제 오리옹호에서 노역에 종사하던 한 죄수가 선원 한 명을 구조하고 돌아오다가 바다에 떨어져 익사했다.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체는 해군 공창의 돌출부 말뚝들 아래로 들어가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 사나예의 수감번호는 9430호이고 이름은 장발장이다."


사람들은 기사(언론)를 읽고 죄수 장발장을 잊을 것이다. 다행이다. 장발장의 삶이 다시 시작할 건이다. 사람들은 언론을 너무 신뢰하고 권력은 이 언론을 악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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