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희선 Oct 18. 2023

10월 16일

한 달에 한 번 매월 셋째 주 월요일. 수영장이 쉬는 날이다. 1990년 서른네 살에 친구가 되어 33년 지기가 된 친구를 만나 보쌈과 오리고기 두부와 갖은 채소로 구성된 ‘두부 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북한산 주변을 아주 조금 걸은 후,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대화 내용이 다르다. 그만큼 내 안에 여러 ‘나’가 있다. 그 친구를 만나면 하는 대화는 다른 사람을 만나 하는 대화와 다르다. 우리 둘의 대화는 대체로 자신과 타인의 심리 상태로 이루어진다. 점잔을 빼고 내 안에 눌러두었던 교만과 타인을 향한 판단을 드러낸다. 그리고 대화가 끝날 때쯤에는 과거에도 늘 그래왔듯,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얕잡아보는 그들이 그런 식으로 변하고 성숙해가는 중이라면?”, “모든 사람은 변한다. 그리고 복잡하다. 우리가 선명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원리에 심취한 소년 아메드의 성장담을 담은, 장 피에르 다르멘·뤽다르멘의 영화 <소년 아메드>를 보고 쓴 이정식 목사의 글, “내 행동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까지”가 떠올랐다. 

아메드는 결국 극단적 종교적 신념으로 쿠란의 아랍어가 아닌 생활 아랍어를, 그것도 노래로 가르치겠다는 이네스 선생님을 배교자로 단정하고 칼을 숨기고 찾아간다. 다행스럽게도 살인은 미수에 그쳤다. 소년원에서 또래 여자아이 루이즈를 만났는데, 루이즈가 아메드에게 묻고 스스로 답하는 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인 것 같다. “나는 흐릿하게 보는 게 좋아, 선명하게 보는 게 좋아?”“나는 흐릿하게 보는 게 좋아. 꿈에서처럼. 너를 흐릿하게 보고 싶어.”     


“선명함을 버리고 흐릿함을 택하는 루이즈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아메드의 태도와 대비됩니다.

 (…) 그가 얻은 것은 세상과 타인에 대한 선명함이겠지만, 그 선명함이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고, 나아가 자신의 인간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기에 아메드는 아직 너무 어렸습니다. 그는 세상을 높은 해상도로 볼 수 있었지만, 보이는 것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헤아릴 수 있는 지혜는 없었죠. 결코 하나의 성격이나 특정 단어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 군상의 다양함이나 개별자의 단독성과 같은 가치들이 아메드의 시선에서 과감히 생략됩니다. (…) 하지만 아메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흐릿함을 선택합니다. (…) 아메드를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로만 바라볼지, 혹은 한 사람을 죽이려 한 범죄자로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하다 어느 입장도 선택하지 못하는 혼란이 (엄마의 눈물에) 배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눈물의 모든 의미는 아닐 겁니다. 도리어 그런 아메드를 무람없이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난처함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요?” (<복음과 상황>No.395. 140~145)     


이정식은 아메드의 엄마와 피해자 아네스 선생님이 쏟는 눈물을 타인을 흐릿하게 보기 때문에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가까이에서 선명하게 바라보면서 흘리는 눈물로 본다. 그리고 타인의 허물보다 자신의 한계를 먼저 보는 이 시선이 바로 우리가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윤리적 태도라고 말한다.      

비록 좋게 마무리했지만, 집에 돌아오는 동안,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부터는 나의 부족함을, 나의 선명한 시선을 불편한 마음으로 마주한다. 나도 친구도 여전히 누군가를 제대로 품지 못하는 좁기만 한 품을. 나와 그의 한계를 인식하며 우리 자신과 타인을 재해석하는 길고 끝나지 않는 성장을 해나갈 것이다.      

요즘 읽고 있는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신부, 앙졸라, 쿠르페락, 콩브페르를. 그리고 장발장과 어린 가브로슈를 떠올렸다. 위고가 그려낸(글을 읽는 동안, 위고가 보고 있던 당시 파리에서 일어난 일들이,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지니, 이 작품은 그야말로 위고가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인물들을. 이들은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이들과 같은 실존 인물들이 역사 안에 있었고, 그런 이들로 인해 세상은 진보해왔으니까. 그리고 이 글을 쓴 빅토르 위고의 치열한 삶이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 인물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고 낙심한다. 그러나 대화 중에 말했듯, 이 낙심으로 인해 찾아오는 힘든 시간은 사라지지 않겠만, 다행스럽게도 갈수록 짧아진다. 그런 나를 수용한다. 

작가의 이전글 10월 15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