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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Oct 22. 2023

위험한 사랑

계속해서 생각한다 ‘사랑에는 위험이 동반됩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톨스토이 그 자신은 사회상을 드러내지 못한 작품이라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하는, <가정의 행복>(톨스토이 중단편선 1|작가정신)의 남편이 생각난다. 아내의 그칠 줄 모르는 바람직하지 못한 사교생활을 지켜보며, 아내가 스스로 돌이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남편의 사랑, 성경 안의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다 위험을 동반한 사랑이었다. 어느 순간 나타난 사람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의 위험성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순간부터, 나를 내 본성을 거스를 가능성을, 내 안전을 담보로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믿는다)는 것의 위험성을 떠올렸다.


전철에서 읽는 책은 주로 얇아서 무겁지 않은 것을 택한다. <쇠얀 키에르케고어>/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매튜 D. 커크패트릭|비아)를 전철에서 읽을 책으로 선택한 게 벌써 여러 날이지만 아직 반 정도 읽었을 뿐이다. 그야말로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그야말로 평범치 않은 생각들로 가득 찬 책 한 권. 아주 조금씩, 그리고 반복해서 그 의미를 깨달아간다.


아! 키에르케고어는 어떻게 이런 사실을 깨닫고 우리에게 말해주는지~

키에르케고어는 그동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교회에서 전해주는 대로 어거지로 받아들이거나 모르는 채로 놔둬야 하는 이일,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 이 명령을 듣고 실제로 이삭을 하느님께 번제로 드리려는 아브라함,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이토록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삭이 약속된 아들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가 수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삭 덕분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받은 이 선물은 두 가지 위험을 초래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기도 전에 이미 그를 하느님의 선물로 보았기 때문에 이삭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이삭을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했다.(49)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투사함으로써 이삭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데 실패했다.(54) 둘째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희망과 꿈을 올곧이 하느님께 두기보다는 도리어 이삭에 두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관계를 방해한 것이다. 하느님의 명령은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교정하는가? 하느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신앙의 도약을 행하게 했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직접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느님이 그러하시듯 영원하는 것의 매개를 거쳐 이삭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분리에 의한 관계다. 이는 하느님과 근원적인 관계에서 아브라함과 이삭 모두 개인(단독자)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또한 가장 근원적인 통합에 의한 관계이기도 하다. (<쇠얀 키에르케고어>(매튜 D.커크패트릭|비아) 50)  

키에르케고어가 외톨이, 단독자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톨이’(개인)란, 종교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이 시대가 … 전 인류가 바느시 통과해야만 하는 범주다. 나의 과제는 비천한 하인으로 되도록 많은 사람을 ‘외톨이’라는 골짜기를 통과할 수 있도록 초대하고 선동하는 일이다. 아무도 외톨이가 되지 않고서는 이 골짜기를 통과할 수 없다.” <관점> 중(<쇠얀 키에르케고어>에서 재인용)     



그는 인간 간의 사랑, 그리고 애인, 친구에 대한 사랑의 속성을 선택적이고, 우연적이며, 일시적이라고 말한다. (52) 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넘어 (아내와 남편 사이의 사랑이 아닌)우리의 이웃까지 사랑하라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누가 10:27)고 명령하시는가? 묻고,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모든 통찰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지 결코 혼인 관계로 대표되는 사랑에서 시작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52)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애인에 대한 사랑은 관능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성적인 사랑이라서가 아니라 감각적인 사랑, 즉 사랑하는 사람에게 적극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53) 이런 사랑은 이웃에 대한 증오의 토대이기도 하다. 관능적인 사랑의 경우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에 응하려면 그/그녀는 이기적인 사랑을 위해 이웃에 대한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 설사 본질적인 망설임과 거부감이 느껴진다 할지라도 말이다. 편애란 배제의 근원적 형태다. 그러나 이웃 사랑은 배타적일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이웃에 해당하며 이러한 이웃 사랑은 자아를 재해석하게 한다. (55~56)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이웃이라면 그 사랑은 영원하다. 이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웃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변하든 상관없이 영원히 우리의 이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이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다. (53)

키에르케고어의 생각을 이해한다면, 아마도 오늘 교회가 강조하고 국가가 그 헌신을 강조하는 결혼, 출산을 비롯해 수많은 질문이 이어질 것이다.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나보다 책도 많이 읽고 하니까~ 솔직히 ‘지성’을 떠올리면 네가 생각나. 그렇지만 네 생각은 일반화될 수 없어. 치우쳐있다고.”

그렇다고 인정했지만, 속으로는 ‘일반화할 수 있는 생각이 진리는 아니지’, ‘사실 성경이 말하는 모든 이야기가 일반적이지 않지’, ‘예수를 따른 이들이 일반적이지 않았지’라고 내게 말했다.


남편을 보내고 홀로된 수영장 언니가 남편에 대한 말을 나누던 중, 웃으며 주고받은  웃픈 말이 내게 남는다.

“누구든 혼자 살 기회가 와!”

“그건 아니지. 상대보다 내가 먼저 갈 수 있으니, 그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오는 건 아니지."


이웃을 사랑하듯, 연인이나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각기 단독자로 살아가고, 단독자 됨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가족이란 어떠함일까? 묻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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