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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Nov 05. 2023

11월 5일

남편이 내일 친구와 둘이 동유럽으로 여행을 간다. 어제 남편이 걸으러 나간 사이, 힘들어서 꼼짝도 하기 싫은 몸을 일으켜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 청소도 했다. 남편이 집에 없으면 어떤 일도 하기 싫다. 남편이 집에 돌아와 말하기를.   

  

"청소했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와서 청소하려고 했는데."   

  

그리고 빨래 거리를 찾아 세탁기에 넣고 쓰레기를 정리했다. 재활용품과 일반 쓰레기로 나눠 각각 내다 버리고 들어왔다. 비워진 쓰레기통에 새 비닐을 넣고 또 말하기를.     


"나 없는 동안 이거면 충분하겠지?"   

  

이런 식으로 나를 아끼는 남편이다. 내가 먹는 약을, 날씨에 맞는 옷을, 길눈이 어두운 내가 약속 장소에 어떻게 갈지를 챙긴다. 자기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친구들과 일본으로 갈 내가 이른 새벽 어디에서 공항버스를 타야할 지를 알아내는 이 남편은 사실 나보다 인터넷 활용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오늘은 자기가 떠나기 전에 내가 타고 갈 공항버스 정류장에 가보자고 한다. 이런 남편은 사실 여행을 갈 때, 제 짐은 제가 거의 다 싼다. 지나치게 꼼꼼해서 며칠 전부터 생각하고 정리한다.

그런 그가, 내가 자기 짐 싸는 데 거들어주지 않는다고 칭얼거린다. 칭얼거린다는 표현이 맞다. 내가 뭘 해주기를 바란다기보다, 무심해 보시는 내 관심을 받고 싶어서 부리는 어리광이다. 그런데, 나는 미리 앞당겨 움직이는 사람이기보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형이라 티가 나지 않는다. 전날 거실 한복판에 여행 가방을 열어 놓고는, 머릿속에 정리한 것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다가 그 안에 던져놓는다. 그리고는 한 번에 확인한다. 이런 나와 살려니, 남편이 뭐든 미리 하는 편이라 손해 본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도 나는 이런 남편을 집에 두고 세종에서 올라온 딸, 작은딸과 함께 데이트할 것이다. 나를 챙기고 나를 바라보는 남편이 고맙고 안쓰러워 점심은 함께 먹은 후 나가기로 했다. 아빠가 불쌍해서냐고 딸이 묻는다. 불쌍하다. 사랑이 그런 것이다. 어제 읽은 엔도 슈사크의 글에서, 엔도는 버리지 못하는 게 힘들어하라고 사랑이라고 한다. 나는 공동체를 힘들어하고, 그래서 버거우면 조용히 떠난다. 새삼스레 문제가 많고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이들을 떠나지 않고 어떻게든 꾸려가는 이들이 존경스럽고, 단칼에 누군가를 끊어내는 이들을 의심한다. 나는 조용히 거리를 두고 멀어진다. 물론 그런 이들을 만나게 되면 어제까지 만나온 사람처럼 느끼지만 말이다. 나는 그 두 사이에 끼어있는 사람이다. 가까이 섞이지도 완전히 연을 끊지도 못한다. 이것도 사랑이긴 하리라. 

지금 나는 남편이 빨래를 돌리며 떠날 채비를 하는데 이 글을 쓰며 남편의 사랑을 떠올리는데 남편은 이런 나를 느끼지 못하리라. 결국, 내가 나가는 대신 딸들이 집으로 왔다. 남편이 싱긋벙긋 말한다. “순리대로 됐군”           



작은딸은 버려지는 식물을 가여워한다. 사랑이다.

얼마 전 남편이 지나치게 자라나는 연필선인장 가지를 쳐 '방생한다'는 명목으로 개천 변 풀 속에 버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딸이 불쌍하다며 다시 데려오라고 했고 나는 그 자리에 다시 가서 가지 일부를 가져왔다. 나머지는 남편이 말했듯 방생이기를 바라며.

며칠 전 딸이 집에 오더니 확인했는데, 남편이 그냥 남은 화분 자체를 가져가라 했다. 딸도 사위도 망설이다가, 너희가 안 가져가면 그냥 버리겠다고 하는 말에, 사위까지 그럼 가져가겠단다. 불쌍했겠지. 남편이 그 아이들을 알고 있었고 그 점을 잘 이용했다. 

작은딸은 어제도 화분을 집에 들인 모양이다. 딸이 일하는 매장은 식물이 많은 게 특징인데 앞으로는 매장에서 식물을 빼겠다고, 가져갈 직원들은 빼가라고 했단다. 한밤중 퇴근하며 세 개의 화분을 들고 왔고, 제 남편에게 트럭이라도 빌려 데려오면 어떻겠냐고!

나도 직원들에게도 외면받으면 버려질 그 식물 아이들이 가여워 일단 가져올 수 있는 대로 가져오고 되는대로 분양하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 있던 베란다 샷시가 불법이라 해서 철거했기에 아이들로서는 이미 기르고 있던 식물을 데리고 있기도 벅차게 되었으니 말이다. 땅에서 자라는 것들을 사람이 즐기려고 분에 넣고, 때로는 이런저런 줄로 옥죄어 분재로 만들곤 하다가, 또 마음대로 버리곤 한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지구에 행사하는 폭력은 이리도 다양하다.

결국, 사위는 월요일에 딸이 일하는 곳에 가기로 했단다. 어떻게 식물 아이들을 데려올지 궁리하기 위해. 참 죽이 잘 맞는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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