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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Dec 31. 2023

12월 30일

올 연말연시는 손주들 해와 달, 그리고 두 딸과 작은 사위와 더불어 지낼 것 같다. 아직 방학 전이지만 손주들 보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딸도 손주들도 서울에 올라올 만큼 우리가 보고 싶은 거겠지) 오늘 서울에 온다. 작은딸 부부가 1월 1일에나 집에 올 수 있으니, 클 딸은 세종행 버스를 1시에서 7시로 옮겼다.

내가 아이들이 오면 지나치게 흥분한다고 잔소리하던 남편도 실은 자기만 모르지 들뜬다. 아침부터 내가 나의 창조적 두뇌를 열심으로 굴리며 당근 두부밥, 녹차 두부 연근밥, 보리빵을 만드는 동안, 나의 부엌이 열일 하는 동안, 남편 역시 콧노래를 부르며 청소기를 돌린다. 옆에 와서 키득거린다. 건강식이라며 정작 만들어 놓은 음식은 그대로 놓고, 여우김밥에 전화를 걸어 김밥 5줄을 예약했다. 12시 반에 찾으러 가겠다고. 12시 반에 김밥을 찾아 우리 둘은 고속버스터미널로 간다. 아이들을 만나러 말이다. EBS 프로그램 <왔다! 내 손주>에 나오는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어쩌면 못 올 뻔했다. 어젯밤에 카톡이 왔다.


“현중이가 갑자기열나고 목아프대서 급 소아과옴”“빨리 약지어먹여야징”

“낼 탈 안나게”


“그래야지. 독감인가? 이번독감이 심하지는않다고하지만, 만반의태세를”


​나는 그리 답하고 독감에 대해 검색을 했다. 최근 독감이 유행해 소아과 환자가 넘쳐나는데, 약 부족 사태까지 있다는 뉴스가 있었다. 다시 카톡이 왔다.

“대기 34명이라 무쟈게기둘리는중”

“병원이 폭발하겠어”

“대기 34명이라 무쟈게기둘리는중”


독감은 아니고 인두염리란다. 약 처방받고 집으로 와 당장에 약을 먹였단다. 알약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단다. 다 자랐구나 싶다.




오늘 아침 눈이 온다. 그것도 펑펑! 아이도 아픈데 눈까지 오니 걱정이다.


“현중이는 차도가 있나?” “눈이많이오는데, 차가괜찮을까?”“무리하는거 아닐까싶어서말이지”


아이는 심하지 않고 세종은 눈이 오지 않는단다. 결국, 우리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상봉했다. 라운지가 있어 그곳에서 사간 김밥을 먹이고 전철로 집으로 왔다. 오는 중 딸이 말했다.


“엄마. 정말 안 되겠어.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양귀비 1호처럼 아주 새까만 색으로 염색 해!”


그렇지 않아도 다 역시 은근 한번 염색을 해볼까 싶긴 하다. 어쩌면 내일 염색약을 사서 염색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face app’으로 긴 머리에 젊은 나이로 사진을 수정해봤다. “할머니. 저는 염색 안 하시면 좋겠어요.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손주 해의 말을 듣고 다시 갸우뚱했다.


집에 오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 색종이를 산 손주들은 종이접기 중이다. 요즘 종이접기에 빠져있다나? 일기를 쓰고 모은 용돈으로 종이접기 책을 세 권이나 샀단다. 다양한 세계에 들어가, 다양한 걸 경험한다면 그보다 좋을 게 없다. ​



남편이 청소를 돌리며 작은딸의 이야기를 했다.


어제 아침에 나한테 지은이가 전화했어. 나한테 미안하대. 그저께 나한테 소리 질러 미안하다고. 내가 언제 소리를 질렀는지 아빠는 모르겠는데? 너는 원래 그런 아이라 모르고 지나갔는데? 라고 했는데, 그래도 미안하다고 울었어.”


“그래? 철들었네.”


나이 듦의 효험일까? 병듦의 효험일까? 그제 딸이 “아빠는 재빈이니까, 잔소리를 할 수도 없고 괜히 엄마한테만 잔소리하게 되잖아.”라고 했다. 아빠가 재빈이라는 게 늘 마음 한켠에 있나 보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늙음도, 아빠의 늙음도. 웬만해선 사과하지 않던 아이인데, 서른이 넘어서면서부터 사과하는 일이 잦다. 그리고 점점 더. <레미제라블>에서 읽은 ‘빈궁의 효험’이 생각난다. 빈궁이던, 나이 듦이건, 병이건 그 효험이 있는 정도라면 참으로 다행 아닌가. 견디기 힘든, 그야말로 사람을 무너뜨리는 아픔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던가. 사실 오늘 나의 사소하지만 큰 행복을 페이스북에 쏟아놓고는 아픔을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버린 이들을 떠올리며 마음에 걸린다. 여전히 삶의 터전에서 힘에 부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좋은 소식이 있어 다행이다. 얼마 전 병명도 생소한, 아니 아직은 정확하지 않은 병으로 입원해있던 지인이 예상되는 최악의 진단을 피하고 퇴원한다는 소식이 있었고 일인 출판사를 하는 또 다른 지인이 펴낸 책이 국민일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출판사 대표 역시 혈액암으로 투병 중인데, 이런 책들을 내고 있다. 이미 지난 네 권의 책이 그렇게 좋은 평가를 내었다. 나 역시 읽었고 인정하는 책들이라 그 소식이 더 반갑다. 그들의 절박한  심정이 그들을 겸손하게 이끈다. 그와 더불어, 절박한 심정이 없는 나의 태평함이 걱정이기도 하다. 절박하지 않은 심정. ‘그건 천성일 수 있을까? 안일함일까?’​




좋은 책들, 내가 지금 읽는 책 역시 그렇다. <고전을 만나는 시간>!


“장담하건대, 언젠가는 후손들이 우리가 동물을 잡아먹었다는 사실 자체에 경악할 날이 올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토록 무분별하고 잔인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만일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부터 와서 훈계조로 손가락질한다면 무슨 변명을 해야 할까? (…) 하지만 미래에선 온 그 사람이 채식주의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1500년대의 영국 런던으로 훨씬 더 멀리 되돌아간다고 상상해보자. 그 지역 사람들이 과연 미래에서 온 그 사람의 훈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기존 관습에 대한 대안들을 마음 속에 품으려면 특정한 문화적 환경이 이미 어느 정도 조성되어있어야만 한다.” (83)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들을 죽이는 것이 옳은지 여부는 우리 시대에 의견이 가장 많이 갈리는 문제들 중 하나다. 하지만 수십년 후, 배양육의 생산 비용이 기존 육류의 생산 비용보다 더 저렴해지고 맛에도 별 차이가 없게 되었을 때, 이 문제가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놀라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현재 식습관은 더는 미식적인 측면에서 필수적이지 않은 만큼 순식간에 도덕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일로 탈바꿈할 것이다 "_토머스 네이글 <뉴옥 리뷰 오브 북스>(<고전을 만나는 시간> 83에서 재인용)


이는 과거를 규정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 중 하나다. 호모북커스에서 <어떻게 먹을 것인가>(개롤린 스틸

메디치)를 함께 읽으면서, 배양육에 관한 글을 보게 되었을 때, 이렇게까지 해서 고기를 먹어야 할까? 생각하며 매우 비윤리적으로 읽힌 적이 있다. 오늘 나는 또 내 생각을 얼마든지 수정할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는다. <고전을 만나는 시간>에서 말하듯, 과거는 부분적이며 상대적으로 완성되었을 뿐 끝나지 않았으며, 현재 역시 같은 과정에 놓여 있다. 현재의 가치관으로 과거를 무시하는 태도는 옳지 않으며,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예측하는 태도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한다. 책에서건, 사람에게서건 진짜 알맹이(132)를 발견하는 게 중요하며, (과거에 았던 이들의 도덕적 문제점과 이상적인 순간을 동시에 발견하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책 읽기(133), 창조적 이중성의 관점(133)을 놓치지 않는 그야말로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미 죽은 이의, 이미 죽은 이의 책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과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실로 그 누구도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81)


“과거의 잘못된 가치관, 혹은 과거의 사람들을, 그것의 단점들을 보며 전부를 삭제할 것인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 생각의 폭은 지극히 좁아질 것이며, 그렇고 그런 생각들 안에만 갇힐 것이다.”(85~87)


“과거의 사상가들을 예찬하는 건 도덕적으로 위험한 일이 되어버렸다. 칸트(백인우월주의)를 찬양해보라. (…) 아리스토텔레스 (남성우월주의)를 칭찬해보라. (…) 데이비드 흄(니그로들과 인간의 다른 모든 종족 전반이 백인보다 열등한가? 하는 의문을 품는)을 기리는 찬사를 적어보라. 후략”_ 쥴리언 바지니 (<고전을 만나는 시간> 80.에서 재인용)


“바지니가 말하는 주된 주장은 이 인물 중 그 누구도 반대되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메리 울스턴 크래프트, 버지니아 울프, 프레더릭 더글러스, 마틴 루서 킹 주니어 같은)과 맞닥뜨리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81)


“칸트와 흄의 기호마저도 그들 시대의 산물이란 것은 실수와 악덕이 만연된 환경에서는 위대한 사람들조차 그런 폐해를 간과하곤 한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상기시켜준다.” _쥴리언 바지니 <고전을 만나는 시간> 81.에서 재인용)


“실로 그 누구도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81)


<고전 읽기, 그리고 쓰기> 모임 멤버들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으며 이 놀라운 내용에 감탄하는 동시에 위고가 가진 생각의 한계를 느꼈기에, 다음 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한 이 책, <고전을 만나는 시간>을 선택했다. 호모북커스에서 함께 읽은 <진리의 발견>과, 그래서 내가 또 사들인 <19세기 허스토리>에 기록된 놀라운 여성들을, 같은 시기에 살았지만 빅토르 위고는 이들 19세기 여성들을 맞닥뜨린 경험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한다.


“실로 그 누구도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일지라도, 나와 우리의 아이들이, 나와는 다른 지역과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 역시. ​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넉넉하게 보이지만 은근히 까다로운, 아니 가끔은 대놓고 까다로운나를 돌아보며 새해에는 좀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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