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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Dec 22. 2021

손자의 닭똥같은 눈물

벌써 2년 전 이야기가 되었다.


추석연휴 온가족이 모였다.
서방님들과 손아래 동서들 조카들이 왔다. 큰딸과 사위는
7살 5살 사랑스런 손자들을 앞세우고 왔고, 한달전 결혼한 작은딸과 사위도 왔다. 내 건강 때문에 외식을 하게 된 것은 한편 편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래도 명절분위기를 내기에 부족하다. 힘들더라도 건강하기만하면 집에서 명절상을 차리고 싶다.
서방님과 동서들과 조카들이 먼저 떠났고 두딸네 식구들과 손주 둘이 남았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지만, 손주들이 있으면 그저 즐겁다. 보내기가 아쉽다. 루미큐브라도 하자고 했다가 윷놀이를 하자고 바꿔말했다.
손주들에게 루미큐브는 어렵기에.
윷놀이가 시작되었다. 5살배기 작은 손자는 밖에서 나는 소리가 그렇게 큰데도 굳세게 잠을 잔지라 큰 손주가 도리어 방해없이 윷놀이를 할 수 있었다. 할머니 말 4개가 거의 다 판을 나와 한개의 말만 남겨놓고 있는데, 손자의 말이 그 말을 잡는 바람에 큰 손자가 이겼다. 세상 좋아라 떠든다. "내가 왕이야?" 손자는 흥분했다. 크게 흥분했다. 다음 판이 벌어졌다. 윷만 나오면 무조건 좋아했고, 할머니나 이모 말을 잡았다고 더하라고 하면 그렇게 좋다. 얼굴에는 함박꽃이 핀체 오므라들지 못했다.

그렇게 첫번째 윷판이 끝나고 두번째 판이 벌어졌다. 윷이다. 어머 이게 웬일이야 두윷이야. 어머 걸~ 잡아 잡아. 또 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신바람은 고조되었고 손주는 즐거워하며 순식간에 공중부양 하기를 반복했다.

오잉!  '모'~다. 어? 모?
손주가 던진 윷가락 네개가 다 엎어져있었다. 그러나 잠시후, 아니야 도야. 도.
아닌데? 모야.
아니야 요만큼 뒤집어졌잖아. 도야 도.
엄마도 이모도 다 도라고 판정했다.
손주는  자기가 모늘 던졌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도 모였으나, 난 언제나 딸들에게 진다. 문제는 손주가 상황을 충분히 납득하도록 아무런 시간을 주지 않은 것이다. 작은 아이니까~, 손주도 도개걸윷모가 한칸 두칸 세칸 네칸 다섯칸을 갈 수 있음을 알았다. 이겨도 져도 제가 제 말을 놓도록 설명하며 도와줘야 했지만, 손자는 말을 놓을 줄 모른다는 이유에서 이모는, 아니다. 모두가 아예  너는 말을 건드리지마. 우리가 놓을께~, 손주는 제 말을 놓을 수 없었다.작은 아이니까~
나도시간이 자나서야 이생각 저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시 윷 판으로 돌아가 이야기해보자. 아까도 요만큼 뒤집어진걸 윷으로 판정했으니 모가 아니라 도가 된 것이다.
손주가 모란 말이야, 모야~ 라고 외치며 뒤로 눕더니 제 엄마 옆으로 굴러가 서럽게 운다. 영 그치기 쉽지 읺은지 한참을 운다.
너 그러면 못써. 도라니까. 아까 이모도 윷 하나가 요만큼 엎어져서 걸이 됐잖아. 계속 이러면 윷 안한다. 한결같이 그렇게 말한다. 작은 아이에게는 협박이다. 아이가 일어나 울음을 멈추고 윷을 다시 시작하면서 배시시 웃기 시작했고, 또 조금있다가 어? 윷이야? 또 웇이야?
공중부양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웃음꽃을 피웠다.허허허허~ 허허허허~
이번 판은 할머니가 이겼지만 그저 즐겁기만 하다. 한 판만 더하고 집에 가자.
또 한판을 할머니가 거뜬하게 이겼다. 아무도 손자가 이기게 해주고자 사랑의 술수는 쓰지 않았다. 작은 아이인데도.

손자의 엉엉~울음 소리와 닭똥같은 눈물과 제 엄마에게 굴러가 붙어있던 모습이 가슴 안에 기억으로 남아있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모든 상황을 그저 받아들이기엔 너무 작은 아이가 겪었을
그 억울함이 내 가슴으로 옮겨와 잠깐잠깐 작은 숨이 멎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신의 인격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같다고 말씀하셨던, 키도 몸도 맘도 작아지기만 하셨던 엄마가 돌아가시기까지 겪었을 억울함들은 어땠을까? 또 작은 숨이 멎는다.

세상에 억울함을 당한 수많은 이들.
그들은 그저 뭔가를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억울함을 호소한다. 누군가보다 권력이 작은 정도가 아니라 권리 자체를 빼앗겼기에. 더 가지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함께 살자고 말 할 뿐이다. 그 말을 듣게 하려면 고공크레인에라도 올라가야만 가능한 세상이다. 그들은 난장이기에.

이토록 억울함이 넘치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손자가 경험하는 억울함은 어쩌면 훈련이 될 수도 있으려나?

"나는 역사를 존중해요"라고 말하는 손자는 역사 지리 인물들에 관심이 많다. 누가 시켜서도 아닌데도 스스로 공부한다.
그런 아이를 안고 사위가 말한다. 다들 한다는 선행수업이라는 걸 안해서 내심 걱정스러워요. 이래도 되나?, 하고요.
나는 옆에서 우리 현중이 알아서 다 잘하는데 걱정할 것 없어. 그저 튼튼하기만 하면 다 제 하고싶은것 다 할텐데 뭐.
행여나 손자가 아빠가 하는 알을 듣고 불필요한 생각을 할까, 설레발치며 사위 말을 막았지만, 소시민 사위 심정이 헤아려지니  또 작은 숨이 멎는다.

억울한 이가 없는 세상은 오지 않겠지만, 작은 이들을 등쳐먹는 놈들은 반드시 처벌받는 세상은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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