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30분, 이미 나는 아기에게 아침 분유를 먹이고 엉덩이도 씻기고 세수도 시키고 낮잠 재우고 집 청소와 설거지, 점심에 먹을 채소 손질, 어제 나온 아기 빨래 및 어른 빨래를 마쳤다. 심지어 아침도 먹었다. 커피 드립백도 내려먹었다. 잔뜩 움직이고 시계를 봤는데 출산 전 같으면 막 아침을 시작했을 시간이라 갑자기 깜짝 놀랐다. 심각하게 아침형 인간이 되었네. 이 글을 쓰는 날 아기는 생의 116일째를 맞았다.
백일쯤 되니까 정말로 아기 키우는 게 이전보다 수월해졌다. 먹고 자는 패턴도 제법 일정해지고, 아기와 내가 서로 더 익숙해졌다. 하루를 보내는 게 더 예측가능해지고 안정된다. 아기가 잘 때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하고 처리하는 것도 더 손에 익었다. 아기는 대부분은 저녁 7시30분-8시 사이에 자서 새벽에 한두번 칭얼대고 6-7시쯤 일어난다. 낮잠도 이전엔 바닥에 내려놓으면 울었지만 지금은 침대에 눕혀 자장가 불러주고 공갈 젖꼭지를 물리면 혼자 뭐라뭐라 왱알왱알 하다가 잠이 든다. 생애 초기에는 하루에 12-14번씩 수유할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4, 5번 밖에 먹지 않는다. 아기의 수유와 잠 패턴을 기록하는 어플을 넘겨보다보면 감격스럽기 그지 없다. 이래서 다들 백일의 기적이라고 하는 건지.
가끔 아기의 신생아 시절 사진을 본다.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사진을 보지 않으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 손바닥에 아기 머리와 어깨가 폭 들어갈 정도로 아기는 작았다. 35주에 너무 일찍 나와 다른 아기들보다 몸무게가 훨씬 적었다. 너무 작고 말라서 나는 얘가 정말 요정같다고 생각했다. 모자를 씌워놓으면 더 그랬다. 북유럽 숲속에 사는 잠자는 요정 같았다. 남편이 아기를 들고 있으면 럭비 공을 들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내 팔 한 손으로도 쉽게 안을 수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아기의 행동과 울음도 그때는 모든 게 낯설고 걱정스러웠다. 도대체 왜 이렇게 몸을 배배 꼬는 건지, 딸꾹질을 자주 하는 건 괜찮은 건지, 코딱지는 어떻게 빼줘야 하지, 왜 우는 건지, 이런 똥은 괜찮은 건지, 숨을 너무 크게 쉬는데 괜찮은 건지, 모든 게 다 처음이라 걱정스러웠다.
한 60일쯤 되고나서야, 아 아기는 원래 그렇구나, 하고 덜 걱정하고 더 편해졌던 것 같다. 아기의 울음에 웃을 수 있는 여유도 그때쯤부터 생긴 것 같다. 이젠 아기의 코딱지를 빼주고 손톱 깎아주는 일이 성취감 쩌는 일이 됐고, 몸을 배배 꼬거나 딸꾹질을 해도, 울어도 그냥 좀 둔다. 딸꾹질을 멈추는 데는 그냥 울리는 게 최고라며 좀 울고 있어, 하고 자리를 떠버리거나 아기가 싫어하는 모자를 씌워 울게 만든다. 심지어 아기가 울 때 귀엽다고 웃는다. 자기는 엄청 속상한데 엄마라는 인간은 웃고 있으니 아기가 어이 없을 것 같아서 가끔 미안하다.. 그치만 귀여운 걸..
어느 순간 아기가 항상 누워 있던 모든 자리들이 작아졌다. 침대도 작아지고 역류방지쿠션도 작아지고 기저귀패드도 너무 작아졌다. 내 팔도 남편 팔도 아기에게 이전보다 작아졌다. 아기 눈코입의 상대적 사이즈도 작아졌다. 우리 아기는 신생아 때부터 눈, 코, 입이 다 컸는데, 어느 순간 볼살에 묻혀서 정말 눈코입이 큰지 아닌지 고민스럽게 되었다. 그래서 신생아 시절 사진을 보면 눈코입이 너무 커서 놀라곤 한다. 그때는 턱선이 날렵해서 더 이목구비가 도드라져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턱이나 목을 보려면 퉁퉁한 턱살을 젖혀야 한다.. 뱃살도 커져서 배를 손으로 들어서 배 밑을 닦아줘야 한다.
팔은 미쉘린이 되었다. 뽈록뽈록한 솜사탕 큐브가 한 네 개 이어진 것처럼 생겼다. 살이 접혀 있는 부분은 잘 열어서 닦아줘야 한다. 다리는 진짜로 부러질까봐 너무 걱정스러운 얇은 다리였는데, 지금은 퉁실퉁실해졌다. 버둥거리는 발에 맞으면 정말 아프다. 정말… 아프다.. 아기가 고 튼실한 다리를 끊임없이 움직여대는 통에 침구가 항상 흐트러지기도 한다. 목도 제대로 못 가눠서 안아서 어깨에 기대개 하면 고개가 폭 어깨위로 폭 떨어졌었는데, 지금은 등이랑 목을 꼿꼿이 세워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구경한다. 엎드려서 고개를 들고 노는 시간도 길어졌다. 한참 입던 옷이 사이즈가 맞지 않아 옷장 속에 처박히는 때가 오면 괜시리 뿌듯하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큰 거지? 눈 떠보면 커져 있고, 또 커져 있고 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겠지. 나는 식물 하나도 제대로 키워본 적이 없는데, 아기가 이만큼이나 쑥쑥 자랐다니 너무 신기하다. 그리고 아기가 대견하다. 무럭무럭 자라버렸다. 아기가 더 자랐을 때 혹시라도 내가 아기에게 뭔가를 더 기대하고 싶어질 때, 이 대견함을 잊지 말아야지. 너는 존재만으로도 대단하단다. 이제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부르면 숨이 차다. 여러 노래 생각하기 귀찮아서 내가 자주 불러주는 노래는 코끼리가 거미줄에 걸렸다는 노래다. 거미줄에 걸린 코끼리가 한마리, 두마리, 점점 늘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한 여섯마리쯤 불러오다보면 이젠 숨이 찬다. 최대 열두마리까지 불러봤다.
아기와 부모는 처음 만나서부터 너무 사랑한다기보다, 이런 시간을 거쳐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가면서 사랑의 깊이를 키워가는 것 같다. 처음엔 아기도 엄청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낯설고 큰 사람들이 갑자기 자기를 쳐다보고, 엄마 뱃속보다 확실히 불편하고 혹독한 상황에 처했으니. 그러다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손길과 냄새에 익숙해지고, 약 3개월을 지지고볶고 하다 보면 삶에도 마음에도 스며들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그냥 한 백일 넘게, 목도 못 가누는 약한 존재를 귀여워하고, 아끼고, 열심히 돌보다 보니, 이제 내 인생에 깊게 박혀버리는 그런 사랑. 주먹만 꼭 쥐고 있다가, 손에 쥐여주는 인형을 꽉 움켜쥐고 입으로 가져가는 그 엄청난 성장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먼저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깊은 애정. 계속 그렇게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은 심정. 눈만 마주쳐도 너무 귀여워 하는 마음. 이런 게 생긴 것 같다.
가끔 모성애라는 거창한 말에 짓눌리고 겁이 날 때도 있는데, 이제 그런 말은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실제로 갖고 있는 이 마음을 아끼면 될 뿐이다. 누가 어떤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나는 내 사랑에 자신감을 가지면 될 일이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아기에게 그리고 엄마가 된다는 것에 익숙해지는 데 백일쯤 걸리는 건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