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야로센코(1846-1898), <삶은 어디에나> 1888년, 캔버스에 유채 212 х 106cm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삶을 살아가면서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순간 순간의 퍽퍽함으로 질식하지 않을까? 사랑은 삶의 토양이며, 공기며 윤활유다.
그 사랑에 대해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야로센코가 그린 <삶은 어디에나>를 통해 말해보려 한다.
니콜라이 야로센코의 자화상과 니콜라이 게가 그린 톨스토이 초상화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세가지 질문을 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느님에게 벌을 받아 지상으로 쫓겨난 천사 미하일은 이 세 가지 질문에 답을 얻어야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세상에 버러진 미하일은 세상사 어려운 일에 지쳐 힘들어하면서도 자신을 구해준 세묜을 통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다. 세묜은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고 있는 미하일을 구해 주고 그의 아내는 따뜻한 음식으로 그를 보듬어준다. 그때 미하일은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곧 죽음이 닥칠 것을 모른 채 가죽 구두를 주문하는 부자를 보며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다(운명을 아는 힘)’이다.
사실 천사 미하일이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된 이유는 6년 전 한 여인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오란 명을 어기면 서다. 그 여인은 벌목 사고로 남편도 잃고 갓 태어난 아이들을 돌볼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 미하일에게 애원한다. 차마 그녀의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어 여인을 살려주려 하지만 하느님은 여인의 영혼을 데려올 것을 강력히 명한다. 그 과정에서 여인의 시체에 깔린 갓 태어난 아기는 다리를 절게 된다. 그리고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던 미하일은 폭풍에 휘말려 지상으로 추락하고, 여인의 영혼만 하늘나라로 가게 된다. 세묜과 함께 생활하며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찾던 미하일은 우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그때 갓난아기들이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도움과 양부모의 사랑 속에 잘 자란 것을 보고 마지막 질문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는다.
‘사람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이다.
그렇다. 자신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보다 인간의 내부에는 타인을 가엾게 여기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며, 그 사랑은 춥고 배고픈 이를 외면할 수 없는 동정의 모습이기도 하고 남의 아이를 대신 데려와 헌신적으로 키울 수 있는 희생이기도 하며, 자신은 추워도 타인을 위해 외투를 벗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씨 기도 한 거다.
이런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감동을 받은 러시아 화가 야로센코는 <삶은 어디에나>를 통해 자신만의 사랑을 그려 보여준다.
<삶은 어디에나>는 시베리아행 열차가 간이역에 잠깐 멈춘 사이 유형자들이 기차 창틀 사이로 햇빛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콘스탄티노프 화파, 블라디미르의 성모 와 야로센코의 삶은 어디에나 부분화
19세기 말엽 러시아는 현실의 불합리를 견디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황제의 압제에 반대해 민중운동을 한다. 그들은 체포된 후 정치범이란 죄명을 안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 당시 시베리아는 영하 50도의 날씨에 제반 시설 하나 없는 죽음의 땅이었다. 그림의 열차 안에 있는 가족들 또한 죽음의 땅을 향해 다가가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조국의 앞날을 위해 투쟁으로 헌신한 남편의 수형 길을 아내와 자식은 함께한다. 그때 많은 가족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남편과 동행해 생사를 같이 했으며, 그런 여인들의 희생을 러시아를 수호하는 성모 마리아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림 속 여인도 러시아 이콘에 나오는 마리아의 모습과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미래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향하는 그림 속 그들이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한 모습이다. 수형 열차가 잠깐 간이역에 정차한 사이 아이와 가족은 밝은 햇살을 즐긴다. 엄마는 자신들의 하루 식량으로 쓰기에도 부족한 빵 한 조각을 떼어내 아이에게 나눔의 아름다움을, 생명의 귀함을, 그래서 얻어지는 사랑의 감정을 가르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지는 행복을 이차원의 화폭으로 표현한 <삶은 어디에나> 다.
야로센코는 러시아 차르에 반대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정치범들의 열차 안에도 삶과 생명이 있음을, 형극의 수형 길 앞에서도 잠깐의 햇볕을 즐기며 새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눠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음을, 많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 아님을, 빵 조각을 나눠 주는 고사리손을 통해 일깨워 준다. 화려하지 않아도 빛날 수 있고 가난할지라도 풍요로운 영혼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랑은 삶의 본질이며 근원이다. 어떤 형태로든 사랑은 빛을 발해야 하며 그 빛으로 세상은 빛나야 한다. 그리고 치유되어야 한다. 톨스토이와 야로센코는 사랑의 실천으로 얻는 행복을 두 명작을 통해 말하고 있다. 나눠주는 행복에서 얻는 생명력을 다시금 새겨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