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앞두고 있는데 갑자기 저 글의 주인공인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도 이제 마흔이 넘은지도 꽤 되었다. 인간관계를 굳이 칼 같이 자르지 않는다. 그저 오는 연락은 받되 좀 심드렁하고, 내가 딱히 먼저 연락하진 않았을 뿐이다. 저 정도로 눈치가 있는 선배가 내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다는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하진 않았겠지. 추석 전에 연휴 잘 보내라는 전화 이후로 전화통화는 몇 달만이었다. 작년에도 그랬었지만 일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다.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도와줄 수 있는 일조차 거절할 이유는 없다.(이런 게 내 오지랖이다.) 하물며 내 주위 사람에게는 덕이 되는 일임에야. 시간당 80만 원짜리 알바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줄 수 있는지 물었고, 총 보수는 120만 원이었다. 그러나 작년보다 조건은 까다로워서 나와 아주 친한 사람 중에서 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 주위에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이 있어 오랜만에 연락을 해 보았고, 그 사람이 흔쾌히 하겠다고 한 모양이다.
나는 알바를 주선하느라 오는 전철을 놓쳤지만, 선배에게서는 거듭 고맙다는 연락이 왔다. 처음 고맙다는 연락에는 답장을 안 했는데,(용건에는 다 답장을 했으므로) 재차 연락이 오니 또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서 선배에게 "그래도 이런게 참 쉽지 않지 최소한 너한테 좋은 방향으로 돌아갈거야 당장은 아니더라도"라는 덕담 한마디가 도착했다. 이왕이면 당장 도착했으면 좋겠는데.(웃음)
브런치를 보신 분이라면 내가 굳이 언급한 걸 읽지 않았더라도 금세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 이 녀석 참 오지랖 정말 대단한 놈이네' 실제로도 그렇다. 나는 일반인들과 비교해서 조금 과도한 오지랖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주위 사람들이 난처해질 정도로. 이를테면 어떤 일이 있을까. 친구에게 교수 채용 공고를 미리 보고 연락해 주는 정도는 내게는 오지랖에 들지도 못한다. 나는 친구가 지원할 학교에 내가 알고 있는 인맥을 동원해서 친구에게 조금 득이 될 수 있도록 해 줄 수는 없을까 하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적합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의 예를 더 들어보자. 한 번은 친구가 내게 '너 LG그룹에 아는 사람 많이 있지 않아?' 하면서 직원가로 가전제품 하나를 구매할 수 있는지 물었다. 오지랖하면 honest, honest하면 오지랖이지만 그때는 정말 나도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내 걸 사는 것도 아니고, 네 걸 사는데 내 지인에게 대신 부탁해 달라고? 그런데 또 그걸 해 준 게 나다. 돌이켜 보니 친구는 분명히 내가 그걸 해 줄 줄 알고 물어본 게 아닐까 싶다. 이 정도면 정말 오지랖도 병이다. 친구의 친구의 사건을 내가 아는 변호사에게 소개한다거나, 내가 아는 사람들을 내가 아는 지인이 하는 병원에 보내는 것 정도는 내 오지랖 축에도 못 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뭣 때문에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솔직하게 나는 그런 바람이 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오지랖을 부리는 만큼 그들도 내게 이렇게 오지랖을 떨었으면 하는 바람. 예전 회사 팀장님의 아들이 수습할 곳을 구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을 때, 내가 후배의 지인까지 동원해 알아봐 주었듯이 누군가는 내게 그렇게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으면 좋겠고, 무언가 혜택받을 만한 게 있다면 나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렇게 시간당 80만 원짜리 아르바이트가 있다면 내가 할 수 있게끔 해 주었으면 좋겠고(이번 알바는 나는 자격이 안 된다.) 그토록 원하는 특강 자리나 아니면 꾸준히 원고를 기고할 일도 누군가가 내게 나서서 소개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대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게 되는 서운함은 이런 데에서 온다. '나도 충분히 저걸 할 수 있을 것 같고, 저 사람은 충분히 저걸 신경 써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를 위해 마음 써 주지는 않네' 그 바람에 거의 절연에 가까이 사이가 멀어진 친구도 있다.(내가 절연한 건 아니고) 이제는 나도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나 같지 않고, 모든 사람이 나처럼 할 수도 없다는 것을. 나의 오지랖은 아주 특수한 나만의 성향이다. 어찌 다른 사람에게 나와 같은 오지랖을 기대하면서 살 수 있겠나. 그저 선배가 이야기한 것처럼 언젠가는 내게 덕이 되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사는 수밖에.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 선을 쌓은 집안엔 반드시 남아 있는 경사가 있고, 나쁜 일을 쌓은 집안엔 반드시 남아 있는 재앙이 있다. 내가 선을 쌓았다고까지 할 것은 없지만 왜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착한 사람은 힘든 삶을 살고, 도리어 악한 이가 편안한 삶을 사는가 하는 궁금증에 대해 저런 고사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나는 언제 돌아올지 모를 경사, 언제 돌아올지 모를 재앙이라고 생각했던 듯 싶다. 실제로도 백이와 숙제는 굶어 죽었고, 도척은 죽을 때까지 편안한 삶을 살았다. 가까운 시간을 봐도 전두환이 죽기 전에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단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는 반면, 영화 [서울의 봄]의 수경사령관의 실제 모델인 장태완 장군은 아들까지 먼저 떠나보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부린 오지랖을 지금 돌려받고 싶다. 그래서 늘 서운하다고 생각하려는 순간, 돌아보니 나이 마흔둘에 들어간 성당 청년회에서 나보다 열 몇 살씩 어린 동생들이 '형, 좋아요', '오빠가 안 오니 빈자리가 엄청 크데예' 하는 소리를 들어가며 아이들이 나를 환영해 주고 있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전에 다니던 병원에서는 오래는 40분, 1시간씩 상담을 해 줬다고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저는 그렇게까진 못해 드리고, 한 15분에서 20분?' 이렇게 말씀하셨던 의사 선생님은 여전히 내가 병원에 갈 때마다 40분 이상씩 나를 상담해 주신다.(참고로 다른 친구는 이렇게 병원을 운영하면 망한다고 했다.) 나를 위해 친구에게까지 부탁해 주는 사람은 없지만(그건 근데 정말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지금 주위를 돌아보면 집에 있는 냉장기도 세탁기도 모두 친구의 아이디를 빌려서 직원가로 샀고, 명절에 어머니가 사 오라고 하시는 건강식품이며 동생이 자신의 강의 준비를 위해 준비하는 다과도 모두 어느 회사의 어느 직원의 이름으로 구매한 것들이다. 작은 법률상담 정도를 해 주는 일에는 심지어 변호사들이 내게 밥과 술과 커피를 사 주면서 상담을 해 주고, 3개월마다 받는 스케일링을 위해 나는 지갑을 열어 본 적이 없는데 이만하면 됐지 도대체 뭐가 그리 서운해 할 일인가 싶다.
어려서부터 나는 선생님들께 정말 예쁨을 많이 받으며 자랐고, 부모님은 물론 친척들에게도 '너는 참 인복은 타고났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렇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에 서운해 할 일이 아니지 싶다. 잘 생각해 보면 나는 고마워 할 일이 더 많다. 그리고, 고마워 할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