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벌써 재작년의 일이다. 아내와의 문제로 많이 괴로워했던 때, 한 후배와 함께 음악회에 가게 되었다. 정말로 나는 진심으로 힘들어 하고 있었는데 그 후배는 의외의 말을 했다. '그래도 부러워요'. 뭐지? 내가 말을 잘못 들었나? 후배는 그렇게까지 힘들어 할 수 있다는 건 감정의 폭이 넓다는 거고, 그만큼 더 많은 걸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며 자신은 그런 내가 부럽다고 했다. 솔직한 말로 당시 심정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실제로도 그 후배는 감정의 진폭이 적은 편이어서 거꾸로 나는 그런 점이 너무 부러웠다. 특히 내가 정말로 힘들어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내가 감정의 진폭이 좁은 사람이었다면, 마음이 비교적 고요한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그런데 도리어 후배는 그런 내가 부럽다고 했다. 그때는 내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기 때문에 나는 그런 후배의 마음을 전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 당시 나는 감정의 진폭을 줄이기 위해 약까지 먹고 있지 않았던가.
별다른 약속이 없는 월요일은 내게 가장 고요한 날이다. 화요일과 목요일엔 운동을 가고, 금요일엔 주말의 설렘이 있다.(내겐 설렘이라기보단 걱정에 가깝지만) 수요일은 일주일의 중간이라 혹시 약속을 만들 일이 있으면 수요일에 잡는 편이어서 월요일엔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적막함이 나를 휩쓴다. 나를 제외하고는 별로 사람의 흔적도 없고(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혼자 사는 집이어서 그런지 살림살이도 단촐하다. 다행스럽게도(?) 층간소음도 별로 없어서 그야말로 고요함 그 자체다. 이런 표현이 맞을런지 모르겠지만, 월요일 저녁의 나는 상당히 평화로운 환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불과 1년 전의 내가 그토록 원했던 평화로움인데 나는 이런 고요한 삶이 전혀 반갑지가 않다. 도리어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고, 이런 평화로움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감정은 쓸쓸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번도 감정이 요동치는 삶을 생기가 넘치는 삶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난 40년 넘는 인생을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감정이 그만 좀 요동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요즘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막상 감정이 요동치지 않고 고요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 나는 그 순간이 반가웠던가. 물론 어느 때에는 그런 순간이 필요한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평화로운 월요일 밤을 보내다 보면 비로소 나는 깨닫는다. 아, 나는 잔잔한 삶보다는 파도처럼 요동치는 삶을 훨씬 좋아하는구나.
물론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감정이 요동치는 삶이란 감정의 파장이 항상 (+)에 있을 때일 것이다. 재작년처럼, 그리고 내가 경험하는 많은 때처럼 감정의 파장이 (-)일 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 세 배, 아니 그 이상 힘들어 하기 때문에 그럴 때면 결국 나는 다시 또 '아, 역시 나도 감정이 고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게 뻔하다. 그러나 이렇게 적막한 때를 맞이하게 되면 비로소 나는 깨닫는다. 감정의 진폭이 커서 정말 극한의 감정이 (+) 파장을 느꼈을 때를 나는 정말 그리워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대가는 어쩔 수 없이 또 극한의 (-)의 파장도 느껴야 하는 것일테지.
다행스럽게도 지난 한 해를 온전히 보내면서 나는 극도의 (-) 감정을 느낄 일이 많이 줄었다. 여전히 힘들고 괴로울 때가 많지만 그럴 때는 약의 도움도 받아 가면서 잘 버티고 있다. 돌아보면 지난해 극도로 힘든 감정을 느꼈다고 해서 그 대가로 그만큼의 환희와 재미를 경험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인생이 다 그런 것이겠지. 어떻게 매해 공평할 수 있겠는가. 내가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지난해 내가 힘들었던 만큼, 분명 나는 또 어느 해엔가는 더 많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찬 한 해를 보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결혼생활만 보아도 그랬을 것 같다.)
후배와 대화를 나누고 비로소 1년 하고도 몇 달이 더 지난 지금에 와서야 깨닫는다. 그렇구나. 감정의 진폭이 큰 것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이런 말을 하면 아마 실례겠지만) 그 후배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나는 느끼면서 살고 있고, 그만큼 사람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지지 않는가 싶다. 감정의 진폭이 좁은 사람은 감정의 진폭이 큰 사람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테니까. 반면 감정의 진폭이 큰 사람은 그래도 감정이 고요했던 때를 짧게나마 경험하면서 산다. 지금처럼. 물론 그 순간이 익숙하지 않고, 쓸쓸하고 괴롭다는 점은 또 다른 느낌이겠지만, 이 또한 감정의 진폭이 좁은 사람은 별로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감정의 진폭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상상했다. 실제로도 더 젊었을 때의, 더 어렸을 때의 나와 비교해 보면 지금의 나는 여전히 감정의 진폭이 매우 넓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예전과 비교하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작아졌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힘든 일과 힘든 감정은 덜 겪고, 신나는 일과 기쁨의 환희는 더 깊게 경험할 수 있는 삶이라면 그것이 정말 최고의 삶이겠지만, 그렇게 기쁨과 재미와 환희를 남들보다 몇 배 더 깊게 느끼기 위해서는 슬픔과 힘듦, 애도와 상처의 감정 또한 어쩔 수 없이 몇 배, 몇십 배 더 힘들게 느끼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는 예전에는 그런 내가 정말 싫었고, 제발 나도 감정이 좀 고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잃지 않으며 살았지만, 마흔이 넘은 이제서야 비로소 풍부한 감정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면서 이제는 감정이 요동치는 그런 삶도 나쁘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차츰 느껴 가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도 '감정이 요동치는 삶'이 아니라 좀 더 긍정적인 '감정이 풍부한 삶'으로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