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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그러지 말라니깐

제 버릇 개 못 줍니다

by honest

몇 해 전의 일이다. 한 선배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부산에서 올라온 형을 기차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형이 데려다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서울까지 왔는데 내가 그 정도는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점차 기차 시간이 다가왔다. 형은 마음이 급했고 그냥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했는데 구태여 내가 데려다드리겠다며 붙잡았다. 그런데 하필 그때 동기가 온다고 조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원래는 동기가 오지 못한다고 내게 조의금을 대신 부탁한 상태여서 돈을 찾아 봉투까지 해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그 봉투는 동기에게 전하고 가야 했다. 형님은 애가 많이 타셨겠지만, 길안내로 보았을 때 기차 출발 시간까지 5분 이상의 여유가 있었고, 나는 5분 전에만 도착하면 충분하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기차역에는 10분쯤 전에 도착해서 형님을 내려드렸고, 형님은 무사히 기차를 타시고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나는 10분 정도면 충분히 여유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기차를 탈 때,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히 넉넉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던 까닭이다. 그러나 형님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신은 최소한 15분 전에는 도착할 정도로 기차역에 온다며 나에게 '너 참 대단하다'고 말씀하셨다. 비꼬는 말투는 아니었고, 형이 그만큼 성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속내는 달랐겠지. 10분쯤 전에 역에 내려드리면서 나는 형에게 자신 있게 '형님 시간 충분합니다'라고 말했지만, 막상 형이 착석한 시간은 열차 출발 2분 전이었다고 한다. 뭐 여유 있게 걸어가서 2분 전에 착석하면 충분한 거 아닌가? 나는 일단 열차부터 타고 자리를 찾으러 간 적도 좀 있다.




어제는 세종시로 출장 갈 일이 있었다. 집이 기차역에서 가까운 관계로 나는 출장 가는 걸 무척 좋아하는데(게다가 꼴 보기 싫은 직원들도 안 봐도 되니깐) 전날 대략 이 정도의 시간에 집에서 나가서 역에 도착하면 충분하겠다고 계산하고 있었다. 그 시간이 딱 10분 전 도착이었다. 역에서는 환승 정도만큼의 시간밖에는 안 걸리는 셈이라 열차가 1~2분 늦는다고 해도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침에 설렁설렁 게으름을 피우면서 준비했다.


집에서 나와 집 근처로 오는 버스를 타고 전철역에서 갈아타면 정확히 10분 전에 기차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문제였다. 분명히 휴대전화에 나오는 버스시간 안내로는 아직 버스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집에서 부지런히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아니, 신호등도 없고(우회전만 한 번 있다) 거리도 얼마 안 되는데 버스가 이렇게 오래 걸린다고?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더 불안한 건, 버스를 타려면 전철역 반대편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기로 결정한 이상 전철역으로 뛰어가는 건 이미 놓쳐버린 선택지나 다름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아무래도 이상해 를 반복하면서 새로고침을 계속 누르고 보니 결국 나는 확인해 버렸다. 아아, 그는 갔습니다. 버스는 떠나버렸습니다.


버스만 탔다면 지하철역에 넉넉하게 도착할 수 있었지만 이미 나는 지하철역을 등지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온 상태였다. 내가 우샤인 볼트였다면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뛰어서 전철역에 시간 내에 도착하기란 불가능했다. 물론 다음 열차는 탈 수 있었다. 다음 열차를 타면 기차역에는 3분 전에 도착하게 된다고 나왔다. 3분이라, 3분.. 환승역이라 해도 거리가 꽤 있는 셈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3분 안에는 자신이 없었다. 이제 정말 큰일났다.


다른 버스 노선들도 계속 검색해 보았다. 다른 버스라도 금방 온다면 지하철을 쫓아 탈 수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버스들이 금세 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1, 2분을 다투는 상황에서 3, 4분이라는 금세는 부족했다. 버스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기차역까지 택시를 잡아타서 가기로 결심했다.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기차를 놓칠 상황이었다. 심지어 택시를 탄다고 해도 안정권이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계속 회로를 돌렸다. '택시기사 선생님이 기차역까지 데려다주시면 무조건 늦는다. 일단 같은 이름의 역 아무 데서나 세워 달라고 하면 거기서부터 내가 뛰는 게 빠르다.'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일단 택시로 기차역까지 가려면 신호도 받아야 하고, 다시 신호를 받아 차를 돌려서(쉽게 말해 유턴해서) 택시정거장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5분은 더 걸릴 것이다. 택시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열차 출발까지는 불과 20분밖에 남지 않아 있었다.


여기, 아직 손 흔들어 택시를 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택시였다. 택시도 드물었지만(왜 드물었는지 모르겠다.) 거의 대부분이 택시가 '예약'이란 등을 켜고 달렸다. 아니면 손님이 타고 있거나. 지난해 친구들에게 단체로 지적을 받았고, 실제로도 택시 어플을 쓰지 않는 바람에 나는 몇 천 원의 손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나에겐 여전히 택시 어플이 없었다. 어플이야 뭐 깔면 되는 거지만 어플로 부른다고 쳐도 택시가 언제 오느냐도 문제였다. 참으로 웃기는 일인데 이런 상황에서 나는 운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그냥 길에서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기로 선택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신호등 건너편에 한 택시가 '빈차' 등을 켜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휴' 저 택시만 탄다면 무사히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택시기사 선생님이 잘 보실 수 있도록 길가에 서서 신호가 바뀌면 손을 흔들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택시는 그냥 나를 지나쳐버렸다. 그냥 지나치진 않았다. 내가 손 흔드는 것을 보면서 '빈차' 등을 '예약'으로 바꾸면서. 아마 그새 택시 어플로 차를 부른 손님이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급한 마음에 점점 기차역 가까운 쪽으로(그래 봤자 몇십 미터지만) 옮겨 있던 상태였다. 아, 그냥 처음에 있었던 곳에 있었다면 저 택시를 탈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처음엔 택시만 타면 그래도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서 나오고 벌써 시간이 꽤 흐른 상태였다.(돌아보니 그래봤자 10분 정도인 것 같다.) 이제는 나도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다행히도 그때 한 택시가 '빈차' 등을 켜며 왔다. '아, 제발 저 택시가 신호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고 바랐다. 신호를 기다리시는 중에 '예약'으로 바뀔 수도 있으므로. 무사히 그 택시는 내 앞에 섰고, 나는 바로 선생님께 'OO역으로 가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선생님께서는 바로 출발하지 않으시고, 'OO역' 중에서 전철역인지 기차역인지 물으셨다. 내릴 곳이 달라진다며. 선생님께 그렇게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내 속마음은 '선생님. 저는 지금 한시가 급해요. 지금 이런 걸 이야기할 상황이 아닙니다.' 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일단 'OO역'으로 빨리 가 달라고 부탁드리자 기사 선생님도 뭔가를 느끼신 것 같았다. 그렇게 택시는 출발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무사히 기차역에 잘 도착해서 기차를 잘 타고 출장에 다녀왔다. 물론 기차에 탔을 때는 식은땀인지 그냥 땀인지 모를 땀으로 몸이 흠뻑 젖었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라야 했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 기차역 주위에 많이 가 본 덕택에 지하 역사 구도나 전체 형태에 익숙했다. 그래서 기사 선생님께 가면서 '어디에 바로 내려 주세요'라고 부탁했고, 또 다행스럽게도 기사 선생님께서 그렇게 바로 내려 주셨다. 내가 전철역 출구에 내렸던 시간이 아마도 열차 출발 5분 전 정도였던 것 같다. 서둘러 뛰어서 기차로 향했는데, 확인해 보니 하필 또 탑승구가 기차역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이었다. '이런, 제길'이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고 내가 열차 옆에 선 것은 2분도 채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부터는 안전선 안으로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1분 전이 되었을 때 일단 열차에 타서 내 탑승칸으로 천천히 옮겨 갔다.


택시비는 무려 7천5백 원이나 나왔다. '기후동행카드'를 쓰는 내 입장에서 그냥 버스와 전철을 탔다면 무료로 가는 셈이었을텐데. 물론 서울 시내에서 택시비가 7천5백 원 정도 나온 건 상당히 저렴한 축에 속한다는 것도 알고 있긴 하다. 다만 나는 1년에 택시를 한 번 정도 탈까 말까 한데, 쓸데없는 궁금증이지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것으로 나는 올해분 택시를 다 탄 것일까, 아니면 올해에 예정에 없던 택시를 탄 셈이니 올해엔 택시를 두 번 타는 해가 될까. ㅎ 처음부터 버스를 놓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차를 끌고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도 했다. 내 차는 저공해차량이어서 공영주차장 50% 할인을 받기 때문에 아마 출장시간을 감안해도 주차비가 택시비만큼밖에는 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무사히 기차를 탄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오,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글까지 쓴 적이 있고, 저 글에 쓰인 것처럼 몇 번 그렇게 초치기 단위로 다니다가 전철역을 눈앞에서 놓친 적 또한 많다. 아마 이번 주에도 한두 차례 그런 것 같다. 그러면서 매번 생각한다. '정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리고 좀 여유를 가지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삼일절 연휴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포여행을 다녀왔는데 기차를 타러 가기 전에 목포는 멀기 때문에 여유 있게 집에서 나서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랬던 덕분에 실제로도 기차에 무척 여유 있게 타서 안정적으로 다녀왔다. 목포에서 돌아오는 기차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몇 차례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여전히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정말 시간을 황금처럼 써야 할 정도로 바쁜 사람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실제로 나는 시간 약속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빠듯하긴 하지만 대체로 시간은 맞추는 편이긴 하다. 그런데 웰링턴 공작도 아닌데 내가 이렇게 1분 단위로까지 맞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랬다가는 오히려 큰일이 날텐데. 예전에 아내는 내가 준비가 느리다고 무척 타박했었다. 아내를 잡기 위해서, 그리고 아내와 헤어지게 되면서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다른 사람이 애타게 만들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참 그대로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참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이번에도 다행히 나는 시간을 지킬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내 애는 좀 태웠지만. 다행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다.(약속시간엔 늦지 않았다.) 시간 약속은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혹시 못 지킬지도 모른다고 애를 태울 바에야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위해서. 어제 하루 동안에도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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