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하여

by honest

오늘 있었던 일이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전에 있던 팀장이 한 일의 뒤처리를 내가 맡게 되었다. (정말이지, 왜?) 아마 3년 전에 한 번 내가 그 일을 했던 까닭인 듯한데 그때는 내 업무가 적다는 마땅한 이유라도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아무튼 그 일처리 때문에 오랜만에 우리 회사와 같이 일을 하는 디자이너에게 연락하게 되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나는 그렇게 매몰차지 못한 편인 데다가 항상 거래처를 좀 더 많이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거래하던 곳이 부도가 나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 팀의 다른 사람들은 그 디자이너와 일하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지만 내 경우에는 불과 재작년까지도 그분에게 일을 맡겼었다. 재작년이라고 해도 올해가 시작된지 닷새밖에 안 된 걸 감안하면, 겨우 작년 한 해를 건너뛴 거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년 한 해를 건너뛴 건 건너뛴 셈이라 오랜만에 연락하는 내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심지어 온전한 일거리도 아니고, 겨우 지난 일거리를 다시 손대는 사소한 일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이 디자이너가 그 일을 맡았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 디자이너에게 연락을 했고, 몇 차례 연락이 오고간 끝에 오늘의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실로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온전한 일거리가 아니기로서니 어떻게 일을 이렇게 하지. 그분에게 부탁한 일은 외관 디자인을 몇 군데 수정하는 것이었는데 나와 처음 일하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나와는 정말 불과 재작년까지도 같이 일을 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뻔히 알텐데 왜 일을 이렇게 하는지 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메신저로 내가 세 가지 사항을 수정해 달라고 적어서 보내면 정확하게 마지막 사항만 수정되어 왔다. 아마 위의 메시지는 읽지도 않은 것이리라. 마지막 사항을 수정하는 것도 어이가 없었는데, 내가 외관에서 그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를 지시하려고 호로 표기해서 보냈더니 (이 정도면 나는 상당히 친절한 지시자라고 생각한다) 그건 읽지 않고 그 부분은 그냥 위와 동일하게 처리해서 온 것이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 부분과 윗부분은 똑같이 간다고 치자. 그래도 괄호는 지워줘야지. 결국 나는 마지막에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마지막 사항만 수정된 결과물로 다른 팀에 이관해 버렸다. 아마, 어차피 내 일이 (심지어는 내가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서였을 것이다.




1년 반만에 그분에게 연락해서 일을 부탁하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우리 팀에서 아무도 그 디자이너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데 그나마 나만 그 디자이너와 함께 일을 하였었는데 내가 지난 한 해 일을 맡기지 않았다는 건, 우리 팀에서 아예 그분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인지 팀장도 '다른 팀 일은 아직 하시나요?' 하고 반문했었다. 그런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외관 디자인 수정을 맡기면서 그분이 일을 잘해 주시면 올해에 나는 다시 그분에게 하나의 일거리 정도는 맡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의 그런 부담감은 온전히 사라졌다. '그래, 역시 이래서 일을 맡기지 않았던 거지.'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는 말이 있지만, 거꾸로도 성립하는 모양이다. 상대가 작은 일도 대강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기기 싫어진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을 맡길 수가 없다고 하는 쪽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처음 내가 이 회사에 와서 일을 시작할 때, 내가 뽑은 디자이너 원픽은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그 디자이너였다. 결과물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나는 오히려 이 디자이너에게 내 일이 몰리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할 정도였다. 말이 좀 겉으로 새는데, 나는 이 디자이너가 지금 일의 결과물을 이렇게 해 오는 데에는 우리 회사도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회사를 다닌지 10년도 넘었는데, 10년 전의 디자인비와 지금의 디자인비가 거의 같다. 물론 이런저런 항목을 추가해서 조금 올려주긴 했지만 대신 그 조금 올려진 비용을 받으려면 다른 일을 또 해야 한다. 지난 10년간의 물가상승분을 감안하면 이 디자이너는 충분히 자신의 작업비가 삭감되었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지 않을까.


아무튼 처음에는 디자인 결과물도 좋았고, 나도 일을 많이 맡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였을까. 내가 예민한 것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 이 사람은 디자인에 전혀 돈을 들이지 않는구나.' 제품의 외관을 디자인하려면 디자이너의 감각도 중요하지만 결국 다른 데에서 차용하는 일부 디자인을 구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최초에 내가 이 디자이너를 원픽으로 꼽았던 까닭에 일을 나누기 위해서 같이 일했던 다른 디자이너는 그렇게 차용할 디자인 구매 비용을 전혀 아끼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이분은 달랐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알았다. 이 디자이너는 항상 무료 이미지로만 디자인한다는 사실을.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감각이 정말 좋고, 디자인을 잘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업계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은 내 생각엔 결국 도 긴 개 긴이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는 자비를 들여 다른 디자인을 구매해 가면서까지 디자인을 해 오는데, 자신은 무료 디자인으로만 버틴다? 글쎄. 과연 경쟁력이 있을까. 나는 이렇게 된 데에는 우리 회사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한다. 진작에 작업비를 올려 주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지 않았을지.


몇 년 전이었던가. 다른 계열사 직원이 디자이너를 소개해 달라고 해서 이분을 소개해 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 계열사 직원에게는 미안하지만 실은 이분이 뛰어나서 소개해 드렸던 게 아니었다. 이 디자이너도 가정이 있고,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하는 사회인이다. 그런데 갈수록 결과물이 떨어지는 게 내 눈에 보였고, 이미 우리 팀의 다른 직원들은 일을 맡기지 않은지 오래였다. 나도 이분에게 점차 일을 맡기고 싶지 않았는데, 뭔가 이 사람의 생업을 보전해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마침 다른 계열사 직원으로부터 추천 부탁이 오자 들어줬던 거였다. 다행히 그쪽에서 맡긴 일은 디자인이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고, 큰 불만은 없이 계속해서 일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 (지금은 우리도 그 계열사와 같이 일하지 않아서 어떤지 모르겠네.)


그렇게 나도 이분에게 맡기는 일거리를 점점 줄여갔다. 돌아보면 처음 이분에게 일거리를 맡겼던 해에는 내 일거리 2.5개 중에 2개를 이분이 맡았었고, 6년 전에도 1.5개의 일거리는 맡겼던 생각이 난다. 4년 전에도 일거리를 드렸지만 그때 결과물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결국엔 나도 3년 전엔 단 하나의 일거리도 드리지 못했다. 그랬다가 2년 전에 다시 하나의 일거리를 맡겼었는데 결과는 역시나였다. 하긴, 우리도 작업비를 한 푼도 올려주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옳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다른 디자이너들은 같은 금액을 받고도 정성스럽게 일을 해 온다. 나는 작업비를 올려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부채의식이 늘 있어서 회의를 할 때도 올려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늘 내고, 그렇게 해서 실제로 하나의 작업종은 지난해부터 40% 작업비가 인상되기도 했다. (적고 보니 엄청난 인상률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작업은 공력은 다른 작업과 똑같은데 원래 작업비를 반밖에 안 주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디자인으로 파생되는 다른 일거리들을 여러 개 만들어 줌으로써 실질적인(?) 작업비 인상 효과를 내기도 했고. 상대가 일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해 오면, 나도 보답할 방법을 찾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정성스럽게 해 가도 보답이 없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곳은 게임이론만 작동하는 곳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거래처와 하루이틀 거래하고 일을 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게임이론에서도 장기적으로 이렇게 계속 사례가 반복되면 결국 균형을 찾아나간다. 이 디자이너도 나와 10년을 넘게 일했다면 정성스럽게 일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비는 올려 주지 못했네.) 그렇지 않았을 때는 어떤지 알 수 있었을텐데.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크게 배우는 계기도 되었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로도 많은 것이 달라지는구나 싶었다. 과연 나는 정말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 처음에 나는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될 외관 디자인을 다시금 수정하려는 모습에서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결국 디자이너 핑계를 대어 가며 대강 마감하고 만 데에서는 '역시, 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전에도 브런치에 적었는데, 나는 내 일을 사랑하진 않지만 늘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일은 누군가에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늘 그 사람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는 철학은 가지고 있고, 덕분에 누구와 일을 마쳤든 간에 상대로부터 늘 '다음에도 꼭 다시 일하고 싶습니다'라는 평을 듣고는 한다. 그래, 작은 일에도 정성스럽게 해야 상대도 그 마음을 알아 주지.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디자이너 분께 서운한 마음도 가득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비용을 받으면서도 늘 애써 주시는 다른 분에게 고마운 마음을 잊지 말고 보답할 방법을 찾기 위해 한 번 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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