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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May 22. 2021

행복하다

화요일이었다. 출장으로 춘천을 다녀왔다. 업무로 약속되었던 시간은 3시. 덕분에 춘천에서 일하는 후배와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날씨가 좋았던 날, 춘천 맛집에서 후배가 사주는 점심을 먹고 소양강이 보이는 시원한 카페에 앉아, 역시 시원한 차를 마시고 있는데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놀라웠다. 나에게 행복이라니. 웬만해서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 내게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그냥 들 정도로 그야말로 좋은 순간이었다. 좋은 곳에서 좋은 음식과 좋은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내 인생도 '좋은 인생'이다, 싶었다.


어제는 친구와 저녁에 쌈밥집을 갔다. 양식을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사는 데, 우리 팀은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분들이다 보니 회사에서 밥을 먹어도 양식 투성이라 요즘 들어 고슬고슬하고 김이 나는 쌀밥이 무척 그리웠다. 우렁장에 새빨간 제육이 있고, 야채 쌈이 곁들여진 솥밥 한 그릇.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와 먹고 싶었던 쌀밥을 (심지어 흑미밥이었다.) 깨끗하게 긁어 먹고는, 또 좋은 날씨를 벗삼아 식당 근처에 있던 성북천을 걸었다. "야, 보자!"고 해서 바로 볼 수 있는 친구가, 힘들여 받은 수당으로 맛있는 쌈밥을 사 주고는, 수다스러운 내 이야기를 들어주며 시원하게 천변을 걷는데, '이번 주에는 행복한 순간이 두 번이나 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두 번만이 아니다.


요즘 승마를 배우는데 수요일에는 아침부터 가서 말을 한 시간 탔다. 아직 몇 시간 타지 못했지만 원래 초보는 실력이 빨리 느는 편이라고, 아니 실력이 는다기보다는 말에 익숙해지고 있다고 봐야 옳겠는데, 이제는 제법 말을 타는, 아니 말에 익숙해지는 기술을 배웠다. 아직은 작게 갇힌 원형 트랙을 뱅글뱅글 도는 수준이지만, 여유 있게 고삐만 잡고는, 때로는 그것조차 놓고는 말을 타고 돌아오는 길이 너무도 신났다. 함께 말을 타는 사람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한 푼이라도 싼 승마장을 찾으려고 멀리 있는 곳까지 가야 하긴 했지만, 덕분에 이렇게 좋은 날씨에는 꽤나 드라이브 하는 맛도 난다.


오늘은 오랜만에 동네 도서관을 찾았는데 '신간 코너에서만 책을 보고 와야지' 생각하다 보니, 얼마 되지 않는 이 책들 중에 내가 빌려볼 만한 책이 몇 권이나 있을까 실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백 수십 권밖에 되지 않는 신간 코너에도 '어머,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돼!' 하는 책이 네 권이나 있었다. 이동진 작가의 말이 문학만 읽는 사람도 위험하고, 문학은 절대 읽지 않는 사람도 위험하다고 했었는데, 정확하게 문학서 두 권에 비문학서 두 권.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또한 만족스러웠다. 책을 빌리고 개천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조금 더웠지만 다행히 내가 사는 집은 층수도 높고 맞바람이 통해서 아직은 창문만 열어 놓아도 무척 시원하다.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400원을 주고 산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여유라니. 지금 이 순간도 행복한 시간이다.




실은 나는 행복과는 거리가 꽤나 먼 사람이고, '가진 것이 없어도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살면 행복하다'든가, '눈높이를 낮추면 행복하다'라든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을 생각해라'라든가 하는 말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내가 항상 내게 없는 것, 내가 가지고 싶은 것,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만 생각하며 사는 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긴 삶에서 보면 지금 이 순간과 이때가 내가 행복했던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시각의 행복마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깊은 행복감을 느꼈던 때는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해 마지않는 군대에서의 어느 한 순간이었다. 지금의 이 더위는 이름도 못 내밀 7, 8월 한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내리쬐는 햇볕과 지나친 고온 속에 강한 훈련을 받던 도중 갑자기 사이렌이 울렸고, 몇몇 동기가 쓰러진 덕분에 훈련을 받던 나와 다른 동기들에게 빨리 윗옷을 벗고 그늘로 피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무게가 나가던 모든 짐을 벗어던지고 런닝셔츠 차림으로 그늘에 앉아서 옛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등 뒤로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의 그 느낌. 훈련을 받던 그 시절이 몸으로는 가장 힘들었던 때이기에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의 그 느낌, 그때의 행복감을 잊을 수가 없다. 군생활이 힘들었다고 해서 모든 순간이 다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이제 나는 그늘진 거실의 소파에 앉아 조용히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남은 토요일 오후를 마감할 생각이다. 보고 싶었던 책을 마음껏 읽으며 홀로 조용히 보내는 토요일 오후라니. 이번 주는 아무래도 행복한 주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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