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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Jun 11. 2022

꿈을 이루다, 어느 대학 강단에 서는

어느 대학의 어떤 특강 출강을 기억하며

요즘에 와서야 돌이켜 보면 어렸을 때의 내 꿈이 정말 꿈이 맞았는가 싶기도 하다. 고등학생 때 나는 아직 꿈이 명확하지 않은 친구들을 내심 속으로 비웃는 입장이었고, 내 꿈이 명확한 것에 대해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산 적도 있었다. 대학에 진학할 때도 그랬다. 아무리 소신지원이라고 하지만 상위권 성적에서 20점을 포기하고 낮추어 지원한다는 게 솔직히 나도 아까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ㅅ대학에 가지 못할 바라면 ㄱ대학이나 ㅇ대학은 어느 과라도 갈 수 있었는데 내 꿈 때문에 이렇게까지 과를 낮춰서 간다는 게 말이 돼?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오랜 시간 지켜온 꿈이었으니까.


결국 나는 실패했고 지금은 어떤 평범한 중소기업의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차라리 꿈이 없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 삶. 그러나 대학원까지 다녔던 까닭에 수많은 내 친구, 선배, 후배들은 나의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어 살고 있고, 그들에게 '나도 대학 강단에 서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기 수차례. 드디어 이번 학기에 어떤 후배가 자신의 대학에 특강 강사로 나를 초빙해 주었다.


이것은 사십 평생의 꿈을 이루게 된 어느 행복한 하루에 대한 기록이다.




지난 1월이었다. 회사 생활에 너무 울화가 치밀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혼자 산책을 하다가 나는 옛날 생각, 그리고 내 지인들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고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길로 바로 어느 대학에 근무하는 선배와 후배에게 연락을 했다. 그 둘이 같은 학기에 같은 학교로 부임하고 나서 매 방학마다 그 학교에 가서는 점심을 얻어 먹고 하루종일 껄껄대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오곤 했었다. 아직 쓰지 않았던 겨울방학의 방문 기회를 이번 기회에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거기서 선배와 후배에게 내 삶에 대한 넋두리를 한참 하던 도중, 후배가 자신의 학교에 특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혹시 해 보시겠느냐며 물어왔다.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럼, 당연히 하지. 사십 평생 꿈꿔 왔던 강단인데.


냉정하게 따지면 경제적으로는 그렇게 남는 장사가 아니다. 특강을 하면 강사료를 주기는 한다. 그런데 특강을 하기 위해서는 그날 나도 회사에 휴가를 내야 한다. 하루 휴가에 대한 보상금, 왕복 기름값, 통행료 등등을 생각하면 남는 돈이 있다고 해도 정말 소액이다. 거기에 강의 준비도 해야 한다. 아마 실질적으로는 손해일 것이다. 만든 PPT 자료를 보니 40장도 넘었다. 46장이던가? 그렇게까지 성의 있게 만든 PPT는 아니지만, 1장을 구성하고 만드는데 대략 5분씩만 잡아도 4시간이다. 실제로도 그만큼의 시간은 들어간 것 같다. 그런들 어떠랴. 평생 꿈을 이룬다는데.


당황스러웠던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처음에 나는 당연히 졸업반에게 특강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후배가 부탁하기로는 그 학과를 졸업해서 내가 일하고 있는 직종으로 진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꽤 있기 때문에 직업인의 현장 이야기를 들려 주었으면 하는 식으로 취지를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수강 태도에 대한 기대도 컸다. 마침 딱 맞겠다고 생각했는데... 수업이 1학년 수업이란다. 이번에 특강을 맡길 만한 수업이 1학년 수업밖에 없었다고 한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뭐, 잘할 수 있겠지. 또 한 가지 고민되었던 건 과연 내가 이 분야에서 최고의 강사일까 하는 점이었다. 호기롭게 강의를 하겠다고 했는데, 다른 친구가 어느 날 한 대학 동기의 유튜브를 보내왔다. 실은 나는 그 친구의 얼굴만 기억할 뿐 이름도 몰랐는데 나와 같은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꽤나 유명한 유튜버였다. 이 친구가 더 잘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학생들에게 미안해졌다. 그렇지만 뭐, 모두가 아인슈타인에게 물리학을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 밖에 현실적인 걱정도 들었다. 한때 대학생 때까지 나는 발표 수업에 있어서는 정말 최강자였다. 늘 자신 있었다. 다른 과 수업을 들으면서 같이 수업을 드는 선배와 형을 대신해서 발표는 내가 했던 적도 많았다. 회사에서도 남들이 발표하는 것을 가끔 볼 때면 '에이, 저 정도 밖에 못해?' 하는 생각을 없잖아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모두 옛날 일이었다. 발표엔 원래 자신이 있었지만 대학 때는 발표할 일도 많았다. 한 학기에도 여러 차례 할 기회가 있곤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내가 누군가의 앞에 서서 발표를 한다면 얼마만에 있는 일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2010년 첫 회사 신입사원 연수 때, 발표에 관한 강의를 들었던 때 이후로 발표란 걸 한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그때는 잘했지만 오히려 그때는 못해도 괜찮았다. 아마추어였으니까. 그런데 대학 강단은 그렇지가 않지 않은가. 여기에서는 도리어 프로페셔널해야 한다. 며칠 전부터는 엄청 긴장이 됐다.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잘하지 못한다면 후배에게도 피해가 간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강의를 얻지 못할텐데. 실은 이건 강의를 시작하기 직전까지도 무척 신경이 쓰이던 부분이었다.


강의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50명 정도 듣는 수업이라고 했는데 사전에 후배에게 미리 질문을 받을 수 있을지 부탁했다. 처음에는 질문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점차 질문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강의 이틀 전쯤에도 30개가 넘는 질문이 있었다. 질문만 잘 엮어서 그 답변만 준비해도 강의 시간은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내 특강은 진로와 관련해 미리 직업인 선배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기에 크게 논쟁적인 부분이 있을 게 없었다. 그래서 질문을 미리 받아달라고 한 것이었는데 덕분에 강의 준비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점차 강의 날짜가 다가왔다. 열심히 마음을 다 잡았다. 마치 대학 때처럼. 어차피 학생들 가운데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자신 있게 해야겠다고. 주어진 시간은 2시간뿐이었다. 2시간은 금방 간다. 못한다고 해도 내가 학생들의 인생을 망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무서워 할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막상 강의를 시작하니 크게 긴장되지 않았다. 시간도 계획했던 대로 거의 100분을 딱 맞추었다. 성공적인 강연이었다. 물론 학생들은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다. 후배의 말로는 나쁘지 않았다고 하던데, 이런 피드백은 내가 직접 받은 건 아니니까.


후배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특강 시작 전에 후배가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나를 소개하고 강의의 의미에 대해 전달하는 시간이 있었다. 만약 그때 후배가 엄청난 카리스마로 청중을 휘어잡고 대한민국에 한 명뿐인 강연자의 모습을 보였다면 오히려 나는 강의를 잘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아니 오히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 준비한 동영상이 잘 재생되지 않았는데 후배와 조교는 많이 당황한 듯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충분히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영상 문제도 금세 잘 풀렸다.


대놓고 자는 학생도 있었고, 대학 강의라는 것이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내가 가벼운 주제의 강의를 하는 것은 아니라서 신경도 쓰이긴 했다. 특강 하루 전에 주호민 씨가 하는 강연을 가서 듣고 왔다. 강의를 잘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관객 호응도는 아주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두가 원해서 듣는 강의였기 때문이다. 선착순으로 마감이 빨리되어 나중에는 좌석을 따로 마련해 추가 모집을 하기도 했으니 청중의 집중도나 반응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강연자가 부럽기도 했지만 대신 내 경우에는 수강생이 모두 대학교 1학년이라는 동질성은 있었다. 그럼에도 원하는 학생들만 강의를 들었다면 좀 더 호응도는 좋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래도 학생들은 호응도 기대했던 것보다 잘해 주었고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동영상을 3편 준비했는데 그에 대한 집중도도 좋았던 것 같다. 강의를 할 때는 무조건 시각 자료다. 훌륭한 강사가 되고 싶다면,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게 2시간은 금방 지나갔고 학생들에게 준비해 준 선물까지 나눠 준 뒤에 선배와 후배와 같이 점심을 먹고는 한참 또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후배는 학생들이 재미있어 했다는 반응을 들려주었지만 나에게 좋은 말을 하느라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솔직히 다 믿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내가 별달리 긴장하지 않고 2시간 동안 시간도 잘 맞추어 강의를 했다는 것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혹시 이번에 잘하지 못했다면 난 앞으로 다시는 강의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장 좋다. 아, 나는 다시 또 강의를 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힘들게 이렇게 한 발을 내딛었다. 그동안에도 강의를 해 보려고 여러 번 문을 두드렸지만 '경력 있는 신입'을 원하는 현실에서 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한 번 경력을 쌓았으니 그래도 앞으로는 아무것도 없었을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겠지. 또 여전히 나는 발표를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그렇다, 자신감이다.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일상이 되어 앞으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될 정도로 흔해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비록 교수는 되지 못했지만 강단에는 설 수 있는 것 아닌가. 한편으로는 그렇게 내가 싫어하는 일로 강단에 섰다는 것도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나 싶기도 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첫 출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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