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는 나의 힘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누군가를, 또는 증오하는 법을 거의 잊어버렸다. 특히 사람을 있는 힘껏 미워하면 그만큼 내가 너무 힘이 들었고 내 손해라는 걸 분명하게 알아 버린 탓이다. 극단적인 비유겠지만, 정신적인 자해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불안했던 중학생 때를 거치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슬슬 안정이 찾아왔고, 사회탐구로 윤리를 고르면서 애늙은이 초등학생 때만 존재했던 성숙을 되찾기 시작했다. 덕분일까,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극한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왜 이런 묘수를 왜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았지? 미성년자와 성인 사이를 정확하게 가르는 선이 있는 것만 같았다. 진작 알았으면 중학생 때 불안정해지는 걸 막았을 텐데, 더 빨리 평안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으며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아닌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내 백세인생에서 10대 후반에 건강한 주관을 찾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나는 현명한 사람인 것 같기도?
그렇게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진 지 꽤 오랜 기간이 지났을 때, 나는 어느 순간 미워하는 법을 완벽하게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완벽하게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다. 완벽하게 잊었다고 생각했던 증오하는 방법을, 매일매일 증오를 실천했던 사람처럼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2024년 12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다. 북한 공산 세력과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숙고를 할 이유조차 없었으니까. 일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좋은 일상만 만들기도 여유가 없는 마당에, 일상마저 파괴하는 게엄이라니. 그것도 완전히 틀린 이유를 들이대는 불필요한 계엄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내가 바라던 탄핵을 요구할 때가 온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따라서 미국에 가기 전까지 최대한 자주 시위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 날부터 바로 국회에 나가서 시위를 했다. 기자들은 국회의사당 계단에서 “퇴진하라! "를 외치던 우리를 사진에 담아 기사로 실었다. 다녀온 날에는 기사 사진에 내가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어 기사를 하나하나 전부 뒤졌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이 나라의 발전에 일조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쉬고 있어 더 자주 시위를 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만큼 간절하고 또 간절했다. 그런 나에게 힘이라도 주려는 듯, 뉴스에서는 연일 집회 참가자의 주 연령층이 2030 여성이라고 보도했다. 20대 여성인 나에게 이런 보도는 내 열정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한 명이라도 현 사태에 관심을 더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소셜 미디어에 게시도 했다. 거의 매일 갔으니 내 팔로워들은(그래봤자 모두 내 친구들이다) 내가 거의 매일 시위했다는 것을 당연히 알았으리라. 그리고 나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사람들에게, 사실은 친구들에게 모조리 거부를 당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라는 말을 처음 이해했다. 방관이 나쁘다는 말도 처음 이해했다. 나의 행보에 반대표를 던지는 듯, 인연을 끊겠다는 의미로 나를 떠나는 사람들이 아쉽지가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속으로는 충격이 컸겠지,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게 걱정 섞인 의심을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히려 나를 비참하게 만든 건 이런 상황에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동조도, 또는 거부도 하지 않는 사람들. 뉴스에서는 2030 여성들의 참여도가 높다는데 왜 내 주변 2030 여성들은 아닌 것 같지? 이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12월 7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부결된 날이었다. 나는 이때 경기도 청년위원 위촉식에 참여하고 있었고, 행사가 끝나면 국회 앞으로 달려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민들과 기쁨을 나누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국회로 달려가는 도중 알게 된 사실, 국회의원들이 투표를 하지 않아 부결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어 온갖 뉴스와 소셜 미디어를 확인해 봤다. 정말로 투표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부결로 이어진 것이었다. 설렜던 마음은 급작스럽게 분노와 한탄으로 변했다. 추위에 떨고 있던 국회 앞 100만 명의 마음은 어떨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계속 올라오는 소식을 보며 국회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날은 저물었고 나와 뜻을 함께하는 시민들이 국회 앞에 빽빽하게 서 있었다. 구두끈을 잃어버린 걸 모를 정도로 추위에 온몸이 얼고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귀가했다. 여전히 내 주변인들은 이 사태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투표를 안 한 저 국회의원들이나, 이 상황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나, 비슷한 것 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8년 전, 박근혜 국정농단 시위 때는 주변에 안 간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간 사람이 없네. 시위는커녕, 이 사태를 얘기 나눌 사람도 없구나. 엄마, 아빠도 시위 가시겠다는 소리는 절대 안 하시네. 저 자는 개인의 일상과 전체의 나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자가 아니었나, 다들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넓은가? 방관이 또 다른 가해자라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참으로 착잡했다.
12월 14일, 역사의 그날에도 국회로 발걸음을 향했다. 지하철이 사람으로 가득 차던 그날,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놀지 얘기하는 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하필 오늘 시위하러 가는 사람들로 교통편이 마비될 걸 아는데, 그런데도 굳이 놀러 나와서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나? 눈살을 찌푸리며 이런 생각을 할 때, 내가 마음에 여유가 정말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이미 이 상황에 질려 버려서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적으로 취급해 버렸다. 그 사람들이 나보다 더 열심히 참여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지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생각이 꼬여 있구나. 그날은 나의 까맣게 타버린 마음과는 다르게,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하늘은 푸르렀고 그렇게 춥지도 않았다. 해가 가장 높이 떠 있을 때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우리 편’ 200만 명과 함께 소망을 외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결국 ‘우리’가 바라던 ‘다시 만날 세계’가 열렸다. 증오로 솟아오른 나의 열정은 이때 기쁨으로 폭발했고, 내가 바라던 걸 이룰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이 순간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2024년 연말은 너무 외롭다고 생각했다. 함께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고, 함께 시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좋아하던 가수는 ‘본인은 노래하는 사람’이라며 나만 느끼는 선을 그었다.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분명 이 주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을 것 같은 사람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나만 힘쓰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들 나보다 더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사람이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이렇게 시야가 편협해지는 것 같다. 내 중심으로, 내 위주로 모든 걸 바라보니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자들을 적대시하기도 하는구나. 나와 남을 저울질하며 나를 ‘정의로운 국민’, 남을 ‘방관자’라고 몰며 점점 내가 공격적으로 변해간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나름 남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평생을 자부해 왔는데, 증오가 나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증오는 내 힘이 되었다가도, 나를 좀먹게 하는 해가 되기도 했다.
글을 쓰는 오늘 12월 29일, 제주항공 여객기 추락 속보를 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 확실한 건, 2024년 연말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너무 가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