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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Nov 18. 2020

천천히 가 보는 길

 집에서 출근하는 길은 아주 간단하다. 길치인 나도 누가 학교까지 가는 길을 묻는다면, 좌회전, 우회전, 직진 몇 번만으로 금세 설명해 낼 수 있다. 오죽했으면, 이만큼 출퇴근 길을 오갔는데 눈을 감고 운전을 해도 얼추 비슷하게 가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출근 길은 늘 막힌다. 안 막히면 2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가, 막히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난다. 출근 첫날 간당간당하게 학교에 겨우 도착하고 나서, 그 다음 날부터는 새벽 일찍 일어나 아무리 막혀도 지각을 할 수 없는 시간대에 출발해 버린다. 차 안에서 지나가는 1분을 부여 잡고 싶은 심정으로  마음 졸이며 어떻게 갔는지도 모를 시간을  보내는 것과 다르게, 여유 있게 보내는 출근길의 질이 달라졌다. 출근길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되었다.

 

 라디오 채널도 이리저리 돌려보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마침 흘러나오면 흥얼거려보기도 하고, 그 날 조회에서 아이들에게 해 줄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려보기도 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멍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네비게이션을 켜면 가끔, 막히는 길을 피해 작은 골목길로 안내할 때가 있는데 머릿 속에서 따로 존재했던 동네들이 길로 엮여 있는 걸 발견하고 혼자 신기해 할 때도 있다.  이른 새벽 눈을 뜨는 건 아직도 힘겹지만, 차 문을 여는 순간부터 학교에 도착하기까지가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되었다.


 학급에 한 아이가 연락도 없이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 봐도, 문자와 카톡을 보내봐도 답이 없고, 부모님께 전화하여 꼭 전화 좀 달라고 부탁까지 했는데도 묵묵부답이다. 마지막 수단으로  어제  '이렇게 학교를 연락없이 나오지 않으면 인성부에 알려서 징계 절차를 밟아야 해. 졸업 앞두고 징계를 받으면 안되잖니. 문자 보면 꼭 연락을 주렴.'라며 협박이 섞인 문자를 남겼고, 몇 시간 후 '전화기가 고장 나서 확인이 늦었어요.'라는, (애들이 너무나 흔하게 대는 핑계인) 답이 왔다.

 

오늘 학급에 들어가 보니 오랜만에 아이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조회를 간단하게 마치고, 오랜만이라고 웃으며 빈 회의실로 데려가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는지 이유를 물었다.


"지금까지 발표한 대학들 다 떨어져가지고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음악을 전공하는 그 아이는, 1학기 내내 학교 생활과 실기 연습을 성실하게 잘 해 나간다고 느껴왔는데, 1학기가 끝날 무렵 그간 스트레스 받았던 것이 하나 둘, 몸의 이상으로 나타나는가 싶더니, 실기 시험을 연달아 치르고, 다시 이어진 불합격 소식에 심리적으로 꽤 큰 타격을 받았나보다. 학교 안 오고 뭘 했냐고 물으니, 집에서 누워 있다가 먹다가를 반복했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위염을 앓으며 바짝 말라가던 아이 볼에 살집이 통통하게 올라와 아이의 속내와는 달리 내 눈에는 아이의 모습이 더 좋아보였다.


"그래.  떨어질 것 뻔히 알며 사는 복권 번호를 맞춰보는 순간에도 잠깐 긴장이 되다가 꽝이면 기분이 나쁜 법인데 그렇게 열심히 해 왔는데 뜻대로 안되는 맘이 오죽했겠니. 그런데 어찌 보면 지금의 상황까지도 견디고 가며 성장해 가는 것 같아. 네가 더 잘 알겠지만 네가 좋아하는 작곡가 중에 시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잖니. 더군다나 지금은 학교에서 어떻게든 너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주려고 하지만, 사회에 나가고 나면 그런 심리적인 이유가 행동의 결과를 변호해줄 수 없을 때가 더 많아. 기본적인 신뢰를 깨뜨리는 일은 하지 말도록 하자. 누구보다 열심히 잘 해 왔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히 잘 했어. 네가 노력한 것들은 대입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꼭 네 삶에 보답으로 올 거야."


  어떤 위안의 말도 들리지 않을 터라 짧게 끝내고 말았지만 아이가 그동안 달려듯 지내왔던 시간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천천히 걸어가듯 지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서며 대학이라는 의미도 모를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삶에서는, 늘 조급하고 초조한 마음뿐이다. 10대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경쾌한 즐거움들이, '입시'라는 압박 속에 묻혀버리곤 한다. 


 고3 담임을 하면, 학부모들에게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은 흔히 '입시생'이라고 불리곤 하지만, 한편으로는 10대의 마지막을 지금 보내고 있기도 합니다. 어머님, 아버님들도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려보면 국어 시험 성적이 어땠는지, 교과 시간에 무엇을 배웠는지보다 친구들끼리 즐겁게 웃고 떠들었던 기억들이 더 많이 있으실 거에요. 아이들이 많이 웃으며 보낼 수 있도록 저도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말은 그럴싸하게 해놓고 결국엔 나도 늘 현실과 타협해서 숫자로 나타난 성적과 온갖 대학 이름들에 휩싸여 한 해를 보내놓고 졸업할 무렵이 되어서야 '아뿔싸'를 외치곤 한다. 그래도 여전히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는 학교 안에서의 시간만큼은, 자신의 삶을 멀리 바라보고, 지나가는 시간들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10대의 마지막 걸어온 이 길들이, 자기만의 시간으로 남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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