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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갈대 감상에 잠겨 갈데를 잃다

20210323

by 메추리

갈대 감상에 잠겨 갈데를 잃다

(11코스, 17.3킬로, 모슬포 하모체육공원-무릉기왓집)


8시 무렵 일어나서 두부 한모에 볶음김치 올리고 들기름을 둘러서 먹었다. 배부르면서도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나가려고 씻고 있는데 라인 직원 지혜에게서 전화가 온다. 잘 지내냐고. 고맙다. 한번 제주로 놀러 오라고 했다.



10시쯤 숙소에서 차를 몰로 11코스 종점인 무릉기왓집으로 간다. 평화로 타기 전 벚꽃길이 아름답다. 재즈를 들으며 운전한다. 시원하게 평화로를 달려 무릉기왓집에 도착한다. 길가에 주차하고 다시 택시를 부른다. 외진 곳이라 한 번에 불러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편하다. 산티아고에 비하면. 날씨는 예보보다는 따뜻하고 바람도 덜 분다.


도착지에 차 세워두고 택시로 출발지로 가는 것도 재밌다. 11:15에 택시를 타고 풍경을 보면서 모슬포로 내려간다. 택시로 14분 거리를 올 때는 걸어서 와야 한다. 얼마나 걸릴까?


겨울에는 제주에서 서귀포 쪽으로 걷는 게 좋고 3월에는 서귀포에서 제주 방향으로 걷는 게 바람을 등지고 걸어서 좋다고 기사님이 말씀하시네. 마늘밭을 지나친다. 여기선 벌써 마늘종을 뽑는다고 한다. 기사님 왈 육지보다 한 달은 빠르단다. 모슬포 하모체육공원에 올레안내소가 없어 인근 서귀포시서부보건서에서 화장실 들렀다 11:31에 출발한다.



3킬로 걸으니 모슬봉 입구로 진입한다. 올레길 걷다 걸음을 멈추고 냉이를 캐고 있는 아줌마가 보인다. 안철수가 박영선 전 장관 보고 '도쿄 사는 아줌마'라고 해서 욕먹었는데, 난 괜찮으려나 몰라. ㅎㅎ 그래서일까 냉이 캐는 여인이 날 힐끗 쳐다본다.


모슬봉 정상으로 가는 길은 막힌 건가? 아니다 올레길이 봉우리를 우회하는 코스인 거구나. 걷다 보니 보이는 갈대. 난 갈대가 좋더라. 정호승의 시 '갈대'도 좋고 올레길 갈 때도 좋고.



갈대 / 정호승


내가 아직도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내 발밑에서 물결치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아무도 살지 않는 강변에 사는 것은

실패도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가장 강한 자가 이긴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라는


죽은 새들의 정다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온종일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의 삶이 진정 괴로운 것은

분노를 삭일 수 없다는 일이었나니


내가 아직도 바람 부는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날아간 하늘에 햇살이 빛나기 때문이다




갈대 감상에 잠겨 갈데를 잃다. 숲을 헤집고 다니다 겨우 발견한 리본. 숲 속에서 잡상은 금물이다. 그래도, 출발해서 1시간 걸어 5킬로를 오다. 5일째 걸으니 이제 몸이 풀린 것 같다.


산 정상에는 어김없이 무덤이 있다. 조상님이 구벼 살펴 줄 테니 조상 뵈러 올 때 고생하란 얘긴가? 후손들 힘들겠다. ㅎㅎ 정상 인근에 중간 스탬프 찍는 곳이 있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산방산 풍경도 멋있다.



보리밭. 바람에 물결친다. 안병석의 '바람결' 그림처럼 말이다. 보리밭에 빠져 또 길을 잃다. 리본이 안 보여 뒤돌아 섰는데 나를 따르는 올레꾼(올레길 걷는 사람)도 머뭇 거리다가 뒤돌아 간다. 아무 말 없이 혼자 가지 말고 좀 불러주지. 까미노는 길 잘 못 들어가면 불러주고 그러는데. 흑.


htm_2007122317411911001140-001.jpg (안병석의 바람결)


(내가 찍은 보리밭)


마늘 밭. 마늘 밭. 마늘 먹고 인간 좀 되란 얘긴가? 호랑이와 달리 곰은 쑥과 마늘만 먹고 21일 만에 인간이 되었다는데, 난 올레길 21코스(A/B코스, 섬 코스 등을 합하면 총 26코스 425킬로)를 완주하고 인간 되란 얘긴가? 가뜩이나 제주는 마늘밭이 많은데... 좌 마늘밭, 우 보리밭 가운데 돌담길이 정겹다. 유채꽃도 살짝 보이고.



2:07에 11.48킬로를 와서 처음 쉬다. 곶자왈 오르기 전 길가 편의점에서 사발면에 맥주 한 캔 하다. 햇살이 눈부시다.


2017년 10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같이 걸은 친구들에게 지금 회사 관두고 제주 올레길 걷는다니 부러워한다. 하루 최대 20킬로 정도 걷는다니 다들 놀란다. 역시 까미노 유경험자들. 거기서는 30킬로씩은 걸었으니. 그것도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티아고 순례길도 여러 가지 길이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길이 프랑스 길(Camino Frances)이다.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서 피렌체 산맥을 넘어 스페인 서쪽 끝 산티아고까지 가는 800킬로의 여정이다. 10~15킬로의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거의 매일 걷기만 하는 고된 일정이 펼쳐진다. 그래서 순례길 걷는 사람들을 순례자(영어로 Pilgrim, 스페인어로 Peregrino)라 부른다. 올레길은 올레꾼이라 부른다. 둘 다 각기 다른 힘듦이 있지만 배낭의 무게, 하루 걷는 거리, 총 거리, 메세타 고원의 건조한 사막 지형, 극심한 일교차, 한낮의 뜨거운 태양 등을 비교하면 아무래도 산티아고가 더 힘들다. 가뜩이나 난 현재 자동차로 목적지까지 이동하고 택시로 출발지로 돌아와서 걷기 시작하고, 배낭도 2-3킬로도 안되니 이건 완전 황제 트래킹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매일 제주시 1인실 레지던스 숙소로 돌아와 기다릴 필요 없이 샤워하고, 빨래도 할 수 있으니 어떻게 비교가 되겠는가.



곶자왈, 암괴들이 불규칙하게 널려있는 지대에 형성된 숲을 말한다. 제주에는 4대 곶자왈이 있는데, 오늘 걷는 곶자왈은 한경-안덕에 있는 곶자왈이다. 원시 생태계 같은 숲이 아름답다. 참가시나무, 개복숭아 등 다양한 나무와 평탄한 오솔길,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정겹다. 그렇게 5킬로 가까이 곶자왈을 즐기며 걷다. 다음에는 대정읍에 있는 '제주 곶자왈 도립공원'도 와 봐야겠다.


11코스 종점에 거의 도착할 무렵 코인데스크코리아 유신재 대표에게서 전화가 온다. 콘퍼런스 하는 데 LINK(LN) 에어드랍 가능한지 묻는다. 이거 어쩔고. 오늘이 3/23일이라 회사 관뒀다는 얘기도 못 꺼내고. 일단 정중히 거절했다. 난 3/31일자로 퇴사한다.



오후 3:56에 18.59킬로 26,283보를 걸어 11코스 종점(12코스 출발점)에 도착하다. 올레안내소 역할도 겸해주는 12코스 출발점에 있는 무릉외갓집에서 천혜향 주스로 갈증을 해소한다. 맛보기 유과도 먹으니 함이 난다.



집으로 돌아가려 나오는데 그때 도착하는 대략 나보다 대여섯 살은 위로 보이는 형님이 한분 계신다. 12코스 출발점 이 곳은 좀 외진 곳이다. 카카오 택시도 한번 호출 실패 끝에 다시 호출해서 10분 넘게 걸려서 택시 탄 곳이다. 그래서 어떻게 돌아가시냐 물으니 버스 타고 서귀포 간다고 하신다. 서귀포도 좋으니 태워 드린다고 하니 첨엔 머뭇 거리더니 버스 타는 큰 거리까지 걸어가려면 최소 한 시간은 넘게 걸리니 태워달라시네. 원래 종점에 도착하면 더 걷기 싫은 법이거든. ㅎㅎ


차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형님은 첫 번째 완주 후 이번에 두 번째 올레길 도전이라 신다. 복습하듯이 걸으니 재밌다고 하시네. 이내 산티아고 얘기로 넘어가니 3년 전에 레옹부터 산티아고를 거쳐 피스테라(Fistera)까지 걸으셨다고 하신다. 헉. 이런 공통점이. ㅎㅎ


역시 걷길 좋아하니 산티아고 까미노도 걸으시고 지금은 코로나로 못 가니 올레길 다시 오셨구나. 나처럼 말야. 서울 사시는데 서귀포에 보름 머무르며 올레길 걸으신다는데, 내일 12코스 걸으면 혹 만날 수도 있겠다. 이것도 인연이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근데 버스정류장은 왜케 가까운 고얏.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숙소로 돌아와 자주 가는 국밥집에서 돼지국밥을 먹다. 빨래도 세탁기 돌려두고 샤워까지 하니 개운하다.


내일은 서울 간다.


P.S.

모슬포를 빠져나오는 길은 다소 밋밋하다. 그렇지만 모슬봉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마늘밭과 보리밭 풍경, 밭 사이 돌담길, 그리고 곶자왈의 원시 생태계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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