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4
어젠 양치도 못하고 뻗었다. 그래도 저녁 먹고 들어와서 샤워는 했다. 뜨끈한 방바닥에서 맥주 한잔 하다 그냥 쓰러진 거다. 새벽 4시쯤 눈이 떠져 휴대폰을 살펴보니 퇴직금이 입금된 게 아닌가? 3/14일에 제주 내려왔으니 딱 한 달 만에 퇴직금이 들어온 거다(퇴직하고 2주 만에). 바로 와이프에게 용돈을 송금했다. 그랬더니 어젯밤 일찍 자느라 카톡 씹은 것을 용서받았다. ㅎㅎ
기쁜 맘으로 양치를 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오전 7:30에 일어나 배편 일정을 확인해 본다. 오늘은 수요일, 흑! 매월 두 번 상추자도에서 제주행 배편(쾌속선으로 1시간 소요)이 휴항하는데 바로 오늘인 거다. 오후 배편 타고 가려고, 그래서 추자 성당과 나발론 하늘길도 여유 있게 걸으려는 계획이 한순간에 틀어졌다. 우얄꼬.
하추자도(신양항)에서 제주 가는 배편(2시간 소요)이 있다 하여 검색해본다. 다행히도 오전 10:40에 배편이 있다. 속히 짐을 챙겨 모텔을 나선다. 추자면사무소 앞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간다. 9시에 하추자도 가는 버스가 있다. 40분을 기다려 그 버스를 탄다.
버스 정류장에서 올레꾼 두 분을 만났다. 한분은 어제 18-1 코스가 마지막 코스였다고 한다. 무려 21일 동안 섬 코스 포함 26개 코스를 다 도셨다는. 축하의 마음을 전해 드렸다. 그분은 제주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공항부터 바로 18코스를 걷기 시작하셨다는데, 그것도 무거운 배낭을 메고 빠른 속도로 걸으신 거다.
다른 한 분은 부산 분이신데 서귀포 7코스부터 시작해서 정방향으로 도신단다. 이제 절반 정도 오셨는데 즐거운 올레길 되시길 기원했다.
버스로 20분 걸려 하추자도 신양항에 도착한다. 표를 사도 1시간은 넘게 남았다. 터미널을 나선다. 저 멀리 언덕에 교회 하나가 보인다. 추자신양교회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기도실이 열려 있어 들어가 무릎 꿇고 기도드렸다. 정난주 마리아 님과 그녀의 아들 황경한 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그리고 나의 안전한 올레길을 위하여. 물론 여기까지 오게 해 주심을, 사고 없이 걷게 해 주심을 감사드렸다.
완주한 아저씨와 배 같은 방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KT에서 정년퇴직하신 분인데 안나푸르나 트래킹도 다녀오셨단다. 14일 일정으로 네팔 들어가서 9일 정도 트레킹 하는 코스인데, 위대한 자연 앞에서 경외감이 들고 신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라는 느낌도 받으셨다네. 나도 히말라야 트레킹 한번 해봐야 되는 것 아닐까? 클레이튼 만든 'Ground X'의 한재선 대표도 다녀왔다던데.
배가 출발한 지 1시간 지나서 갑판으로 나왔다. 좌측으로 희미한 한라산 윤곽이, 우측으로 추자도가 보인다. 맑은 날 엄마가 계신 제주도를 바라보며 눈물 흘렸을 아들 황경한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이렇게 난 추자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있다. 꼭 다시 올 것처럼.
추자도 면사무소에서 버스 기다리며 만난 부산 이영욱 형님을 배에서 내리면서 다시 만났다. 오늘 18코스를 걸으신단다. 제주 연안부두에서 18코스 합류지점이 있어 부두부터 걸어가신다고 해서 나도 같이 걸어서 부두를 벗어난다. 산티아고 얘기를 하시길래 나도 말문이 터졌고 우린 함께 점심까지 하기로 했다. 해장국에 막걸리 한 사발 하면서 산티아고 얘기를 나눈다. 부산에는 산티아고 다녀오신 분들 만나기 힘들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물어보신다.
이 형님은 올해 정년퇴직하시는데 산티아고를 꼭 가고 싶어 하셨다. 코로나로 하늘 길이 닫치지만 않았어도 가셨을 텐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내 책 산티아고 순례기 ‘쫄지말고 떠나라’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조금 도움이 되실 거라 말씀드렸더니 즉석에서 구매해 주신다. 산티아고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밥도 사주신다. ㅎㅎ
영욱 형님은 왼쪽으로 리본을 찾아가신다. 저 앞에 보이는 사라봉을 힘들게 오르시겠지. 난 산지천을 좀 더 걷다 택시 타고 숙소로 돌아온다. 오늘은 햇살 받으며 쉴 거다.
아니다. 오늘 뭐라도 해야지. 지난번 올레 패스포트 잃어버렸을 때 못 찍은 스탬프 좀 찍어야겠다. 오해 마시라, 지난번 올레 안내서의 지도에 찍어둔 스탬프를 오려 붙이기 싫어 다시 찍으러 간 것이니. 차를 몰고 16코스 중간 지점인 항몽 유적지, 16코스 종점인 광령1리, 그리고 17코스 중간지점인 어영소 공원에 들러 스탬프를 찍었다. 어영소 공원에서 바다를 보며 잠시 감상에 잠긴다.
바다를 따라 돌길을
푹푹 빠지는 백사장을
푸름 가득 밭과 산을
헉헉대며 오름을
걷다
모진 바람을 맞으며
뜨거운 햇살을 피하며
걷다
바다 내음도
짙은 숲 내음도
꽃 향기도
반가운 인연도 만나는
길을
걷다
머리는 비워지고
다시 채워질
그런 길을
계속
걷다
이틀 전 참치 해체할 때 만났던 인연, 제주 외도에서 이자카야 하는 임두현 사장님의 ‘미미 이자카야'를 찾았다. 만석이다. 임사장님은 오신다더니 진짜 오셨네요 하면서 놀라워하신다.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 ㅎㅎ
3만 원 오마카세를 시켰는데 사시미도 훌륭했지만 나가사끼 짬뽕, 반건조 청어구이, 직접 발골하여 구워 준 야끼도리 모두 넘 맛있었다. 완전 단골각이다. 뭘 계속 내어 주시는 데 배 터지는 줄 알았다. 배 부르게 먹고 서귀포 내려가기 전에 다시 들리겠다고 인사하고 나왔다.
대리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내일은 어느 코스를 걸을까? 이젠 정말 몇 코스 안 남았다. 내일 아침 일어나 코스를 정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