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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May 01. 2021

34 바람에 신물 난 올레꾼에게 주는 선물(14-1)

20210418

바람에 신물 난 올레꾼에게 주는 선물

(14-1 코스, 9.3킬로, 저지 예술 정보화마을 - 오설록 녹차밭)


4월 16일에 서울 가서 17일 밤에 돌아왔다. 왜 갔냐구? 이번 4/16일은 16번째 결혼기념일이자 둘째 생일이다. 다음 주 토요일에도 서울 갈 일이 있어 건너뛸까 하다가 그랬단 큰일 날 것 같아 다녀왔다. 나도 가정이 있는 사람이다. 나도 평안을 원하는 사람이다. ㅎㅎ



두 기념일이 겹친 날이라 자주 가는 집 부근 'Unknown Diner'에서 티본스테이크와 파스타로 저녁을 먹었다. 역시, 먹혔다. 며칠 전 퇴직금도 보냈겠다, 깜짝쇼로 서울 와서 맛난 것도 샀더니 와이프님이 제주 체류 일정을 연장해 주셨다. 얏호.


다시 오늘 4/18일로 돌아온다. 4일 전인가 SKT 계실 때부터 알고 지내오던 돈정 형님이 제주 와서 올레길 걷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오시라고 했다. 초보라고 걱정하셨는데 아주 쉬운 코스로 모신다고 하니 바로 비행기 표를 끊으신다.  


어느 코스로 갈까? 내가 못 걸은 코스는 저지오름 부근 14-1 코스, 서귀포 부근 7-1 코스, 그리고 모슬포 앞 가파도 10-1코스 해서 총 3코스인데. 내가 걸은 코스 중 일부만 걸을까도 생각했지만 빨리 올레길 완주를 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컸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9.3킬로로 비교적 짧으며 고도차가 적은 14-1 코스면 적절할 것 같았다.  



그 형님이 오전 10시 30분쯤 내 숙소로 오셨다. 차로 근처 '대춘해장국'으로 간다. 형님도 좋아해서 다행이다. 차를 몰고 오늘 종착지인 오설록 녹차밭에 도착한다. 푸른 녹차밭이 펼쳐진다. 그렇지만, 지금 감상에 오래 빠질 순 없다. 다 걷고 누려도 충분하다. 나중의 감동을 위해 지금의 감동은 살짝 뒤로 미뤄둔다.



12:25에 돈정 형님과 14-1 코스 출발점에서 걷기 시작하다. 출발 전 돈정 형님은 올레 안내소에서 올레 패스포트를 하나 사셨다. 역시, 사서 같이 스탬프 찍으며 걷는 게 좋지, 그래야 좀 더 목적의식이 생기지. 패스포트가 2만 원이라 비싸다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 멋진 올레길을 만들고 유지해 준 재단에 작게나마 후원을 한다 생각하면 맘이 좀 편할 텐데.  



잘 닭인 시멘트 바닥 길을 밭을 끼고 가다 숲 사이로 난 비포장 도로로 들어선다. 초반부터 단체로 걸으시는 분들이 좀 있다. 14-1 코스는 웬만한 올레길을 다 걷고 오신 분들이시겠지.  


녹음이 우거졌다. 조금 가니 문도지 오름이 나온다. 이곳은 문도지 목장이 있는 사유지다. 꼬불꼬불 사유지 출입문을 통과해서 오름을 오른다. 나지막한 오름이다. 다 오르니 말 몇 마리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다. 그래 너희들이 진정으로 여유를 즐기고 있구나.



높지 않은 오름 겸 목장인데 전망은 좋다. 저 멀리 한라산과 여러 오름이 보인다. 풍력발전기 돌아가는 모습도 보인다. 바야흐로 신록의 정점이다.


여러 얘기를 나눈다. 형님이 던지는 질문이 신선하다. 삼별초 최후 항전지인 제주, 그 중심에 애월에 위치한 항파두리성이 있다. 제주 토속민 입장에선 삼별초도 진압군도 다 외지 사람일 뿐이다. 항파두리성도 제주도민의 노동력으로 설립되었을 터. 어떻게 되었든 몽고에 대항해서 싸운 삼별초의 숭고한 뜻은 숭배받아야 마땅하다. 그즈음부터 몽고에서 들어온 말이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키워졌다니 이것도 아이러니다.


예전의 제주는 한양에서 귀양 오는 유배지 성격도 강했다. 반대로 해석하면 귀양 갈 정도로 영향력 있고 학문적으로도 우수한 인재들이 제주로 온다는 얘기다. 귀양은 그들로부터 신문명과 신학문을 접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폐위된 광해군부터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선생, 신해박해로 귀양 온 정난주까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그들은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후학 양성 등 제주의 문화와 학문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21세기 현재도 많은 분들이 한달살이 든, 은퇴 후 거주 든 많이 제주로 내려와 있다. 그런데 모두 제주 지역사회에 동화된 것이 아닌 듯하다. 과거에 본인이 아무리 잘 나갔어도 현재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고 쓸모가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러려면, 끊임없이 자신만의 콘텐츠를 생성해야 지역사회에서 존경받고 동화되는 것이 아닐까? 중산간 지역에 멋진 카페나 펜션 지어두고 멋진 진공관 스피커를 갖다 둔다고 해서 사람들이 찾아주고 존경해 줄거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형님과의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혼자 걸을 땐 자신에 집중해서 좋고, 둘이 같이 걸으면 다양한 시각을 나눌 수 있어 좋다.  



사각사각 낙엽 밟으며 걷는 숲길이 좋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잎이 아직도 썩지 않고 푹신푹신하면서 밟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도 내다니 신기하다. 숲 사이로 들어오는 산들바람, 숲이 만들어준 그늘, 낮고 구불구불한 나무. 처음 오름 하나 제외하고 산책으로 다 좋다.  



그래서 더 여유 있게 걷는 듯하다. 느릿느릿. 그래, 여기 코스는 거리도 짧고 바람 부는 해안길 다 걷고 와서 인지 여유가 묻어난다. 코스 설계도 기가 막히다. 초반 오름 하나 그리고 탁 트인 전망, 잘 조성된 숲길, 좀 더 깊숙한 한적한 곶자왈 숲길, 거기에 올레길 걷기 최고의 날씨, 적당한 바람, 아주 완만한 내리막길, 그리고 말이 통하는 사람.



곶자왈 좁은 길로 난 숲을 다 내려오나 싶었는데 바로 눈 앞에 '펑'하고 나오는 녹차밭. 이건 와우다. 녹차밭이 멀리 보이면서 그걸 즐기며 천천히 걸어갈 거라 예상했거든. 그리고 바로 있는 간세 스탬프 박스.  



아주 여유 있게 3시간 동안 9.3킬로를 걷다. 도착하니 오후 3:25분 밖에 안되었다. 오설록 티 뮤지엄에 왔는데 어찌 녹차 한잔 하지 않으리. 녹차 청귤티와 녹차 아이스크림을 형님이 사주셨다. 여유를 즐기다 다시 차를 몰고 월령 선인장 자생지로 간다.



월령 선인장 자생지를 걷다. 여긴 언제 와도 좋다. 백년초 선인장 주스를 못 마셔서 조금 아쉽긴 하다. 협재해변으로 이동해서 올레길 따라 걷다. 수우동, 강식당, 털보 협재밀 지난다.




차로 제주로 돌아와 '미미 이자카야'에서 소주 한잔 하다. 전갱이, 참돔, 광어 모두 숙성이 넘 잘되어 있다. 거대한 참돔 머리구이와 삼치구이도 다 맛있었다.  


그래도 오늘 16킬로를 걷다.  



P.S.

14-1코스는 해안 올레길로 바람에 신물 난 올레꾼에게 주는 선물 같다. 처음 오르막을 제외하곤 다 평탄하거나 작은 내리막길 연속이다. 대부분이 숲길이라 바람도 덜하고 그늘져서 여유 있게 걷기 좋다. 숲을 빠져나오면 '펑'하고 보이는 탁 트인 녹차밭이 주는 푸르름을 즐기는 것도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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