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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May 03. 2021

36 간세 스탬프 박스 후원, 그리고 사려니 숲길

20210420

간세 스탬프 박스 후원, 그리고 사려니 숲길 


오늘은 제주시 숙소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은 항상 단어가 주는 압박감이 있다. 그래도, 루틴은 루틴이다. 1층에서 커피를 뽑아 옥상에 올라가 오늘 날씨를 피부로 체크한다. 오늘도 화창하다.



다시 내려와 음악을 튼다. 오늘은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다. 'James Gaffigan'이 지휘한 레퀴엠을 유튜브로 보면서 잠시 감상에 잠긴다. Dies Irae(디에스 이레, 진노의 날)는 언제 들어도 슬픔과 격정이 교차한다. 그것도 아주 빠른 템포로.


오늘은 올레 후원하러 가는 날이다. 아직 한 코스가 남아있지만 올레 패스포트를 찾아 준 인연이 있는 16코스 안내소가 제주시 숙소 근처에 있어 내일 서귀포로 내려가기 전에 후원을 하려 한다.  


후원하러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내가 이런 큰돈을 후원한 것은 대학 졸업 후 모교에 기부한 이후 처음이다. 아, 네이버 해피빈 통해서 내 책 '토큰 이코노미' 저작권료를 통째로 아동들에게 기부한 적도 있었구나. ㅎㅎ



16코스 안내소 현영선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 주신다. 직접 끓여주신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도 나눈다. 내 책 ‘쫄지말고 떠나라’도 넘 재밌게 읽으셨단다. 다 걸었냐고 물으시길래 아직 가파도(10-1) 한 코스 남았다고 말씀드렸다. 아마도 이번 주 목, 금 정도에는 완주증서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완주증 받을 때 서귀포로 내려오신단다. 흑.  


간세(조랑말 모양의 올레 상징물) 스탬프 박스 후원 자리가 15-A 코스 중간 스탬프 자리와 올해 하반기에 생기는 추자도의 18-2코스까지 두 자리 남았다고 하신다. 고민할 틈도 없이 추자도다. 올레길 중 가장 스토리가 있는 길 아닌가. 눈물 펑펑 쏟으며 기도했던 추자도에 그것도 그 출발점에 내 간세 한 마리가 놓인다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  



260만원을 바로 송금했다. 260이면 내 친구 은익이가 정성껏 키운 생참치 한 마리 가격인데. ㅎㅎ 전체 26 코스니 한 코스 당 10만 원씩 후원한 거다. 이건 올레길을 잘 가꿔주고, 유지해 주고, 감동을 준 것에 대한 나의 조그만 보답이다. 외로운 15-A 중간점도 빨리 후원자가 생기면 좋겠다.  


하반기 설치 예정인 올레 후원 문구(아크릴 제작)


오후 1시쯤 사려니 숲길에 도착해서 오뎅 2개 먹고 숲으로 들어간다. 빼곡히 둘러싼 삼나무와 그 사이 산책길을 걷다. 며칠 전 서울에서 가져온 삼각대도 세워 사진도 맘껏 찍었다. 삼각대에 끼운 아이폰을 애플 워치와 연결해서 찍으니 상당히 편하다. 내가 왜 진작 이렇게 안 했을까 몰라. ㅎㅎ



삼나무 산책로를 지나 널찍한 흙길을 걷는다. 편도 10킬로 정도 되는 길이다. 마지막 코스까지 2.5킬로 남기고 돌아온다. 숲 냄새 가득하다. 돌아오는 길은 좀 더 여유를 갖고 걷는다. 그래도 2시간 넘게 깊은 숲 속으로 들어왔다. 이젠 들어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다양한 식물들과 나무들이 보인다. 쌀에서 돌을 걸러내는 데 많이 쓰이는 조릿대, 영어로는 근육처럼 보인다고 해서 Muscle Tree로 불리는 서어나무 숲, 이름 모를 돋아나는 새순들, 비록 노루가 많이 다닌다는 사려니 숲에서 노루는 보지 못했지만 신록의 아름다음과 신선한 공기를 맘껏 마시며 힐링한다.



돌아오던 길에 물찻오름 앞에서 잠시 쉬다. 소시지 하나 먹으며 플라스크에 담아온 양주를 꺼낸다. 한 모금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다. 한 모금 더 마시고 내려가는 길, 약한 취기가 돌아 더 여유 있고 좋다.  



삼나무 숲. 우리나라에도 이런 숲이 있구나. 캘리포니아 뮤어 우즈(Muir Woods) 같은 삼나무 숲이다. 근데 이게 1930년도 심어진 인공 숲이라니. 좌측은 꾸불꾸불 오리지날 제주의 나무, 우측은 뾰족뾰족한 건너온 삼나무, 그 사이로 토종인 내가 걷는다.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17.77킬로 사려니 숲길을 걸었다. 산책만 하러 왔다 17킬로를 걸으니 조금 힘들긴 하네 ㅎㅎ


마지막 날이다. 제주시에서. 내일 서귀포로 내려간다. 짐 쌀 생각하니 벌써 귀찮음이 몰려온다. 저녁은 매번 가던 돼지국밥집으로 간다. 여기도 마지막이겠네. 주인 사장님께 인사한다. 매번 여기서 저녁 먹으며 올레길의 허기와 피로를 풀었는데. 여기 국밥이 올레길 걷는 에너지의 5할은 될 텐데.


숙소에 와서 세탁기를 돌린다. 글도 편집해서 브런치에 올려야 되는데. 흑, 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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