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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눌린 욕망의 분출

영화 <델마> Review

by 겨울아희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처음 알게 된 건 F 등급 영화 목록에서였다. 똑같은 배우, 역할, 소재의 알탕 영화가 지겨워질 때쯤이면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F 등급 목록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찾는데, 거기서 제목을 본 적이 있다. 그때도 누가 나오는지, 어떤 내용인지는 전혀 몰랐다. 극장에서 개봉 중인 영화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영화는 왓챠에서 시청한다. 그러는 와중에 매주 새롭게 업데이트되는 작품들 속에서 [델마]를 발견했다.


자석에 이끌리듯 포스터 속 여성의 눈빛이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운명과 우연 그 사이에서 수많은 보기들 중에 [델마]를 고른 것처럼, ‘델마’ 또한, 운명과 우연 그 사이에서 감춰있던 본인의 진실을 알게 된다.



사냥의 타깃



딸과 아버지로 보이는 두 사람이 함께 꽁꽁 언 호수를 건너고 있다. 아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얼음 아래에서 열심히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응시했다. 아버지는 그런 딸을 보다가 가자는 말을 건넸고,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걷다가 숲 한가운데에서 잠시 쉬어갔다. 아버지는 총을 장전하면서 사냥 준비를 하고, 아이는 따뜻한 차를 마셨다.


다시 숲을 걷던 그들은 사슴을 발견했다. 아버지의 ‘쉿’ 소리와 함께 아이는 곧 벌어질 다음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사슴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긴장으로 숨죽인 이 순간, 움직이지 않은 사슴으로 인해 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아버지의 총구는 딸을 향했다.


순식간에 다정하게 보이던 부녀 사이에서 스릴러물로 영화의 공기는 빠르게 바뀌었다. 그 사이에 사슴은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사슴이 가버리자 아이는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 아이의 얼굴이 비치며, 오프닝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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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사냥의 타깃이 바뀌면서 어떤 식으로 영화가 진행될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포인트도 한 가지 알려주었다. 딸을 죽이려 한 아버지. 무엇 때문에? 이 오프닝을 기억한 채 영화를 보면, 델마의 가족이 나올 때마다 기괴하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땐 화목한 가정 그 자체다. 잘 이어지다가도 오프닝처럼 한순간에 얼어버릴 때가 있다. 델마가 아버지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뚜렷하게 잘못한 점도 없는데 델마를 엄청 다그친다.


델마에게는 이런 과정들이 모두 일상적인 일이었을 테니 더 따지지도 않고, 순응하면서 나중엔 사과까지 한다. 진실을 알기 전, 아버지란 존재는 델마에게 있어 촛불에 딸의 손을 갖다 대면서 지옥의 고통이라고 알려줄 정도로 극단적이게 엄하지만, 뭐든지 이야기할 수 있는 상냥한 존재였다.



가끔씩 좋은 모부로 착각했다가도, 매일매일 딸에게 집착하듯 전화하는 모습에 총구의 방향이 어디로 향했는지 되새기게 된다. 아빠와 통화하는 장면을 보고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델마네처럼 엄청 엄하진 않았지만, 다들 걱정이 많아 일정 시간이 되면 집안 어른들에게서 내 위치를 묻는 전화가 계속 와서 엄청 스트레스였다. 중학교 때까지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친구 집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저녁 6시까지 집으로 가야 했다.


오히려 고등학교 때는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니까 야자 핑계를 대고 시간 제약 없이 마음대로 놀 수 있었는데, 성인이 되니까 다시 통금이 생겼다. 학교에서 집까지 멀다 보니 막차 시간에 쫓겨 1학년 생활을 제대로 못 즐긴 게 지금까지 아쉬울 정도다. 물론, 델마에 비해 억압의 강도가 약할지라도 그 당시 나에겐 목줄이 채워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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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성인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사냥엔 끝이 없었다. 총이란 도구만 내려놓았을 뿐, 먼 곳에서도 사냥의 타깃이 본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착실하게 감시 중이었다. 결국, 델마는 수년간 세뇌당한 탓에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가벼운 SNS 친구 말고는 속 터놓고 이야기할 편한 친구조차 없었다. 델마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계획대로 해도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집을 벗어난 뒤엔 델마를 묶고 있는 사슬은 조금씩 느슨해졌다.



아냐와 뱀






아냐는 델마에게 있어 본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게 되는 첫 단추다. 모부님은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델마의 세계에서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죄악인 동성과의 사랑이 오히려 델마에게 절대적인 해방을 선물한다.


아냐와의 첫 만남은 특별하지 않다. 뒤에 벌어질 사건이 아니었다면, 도서관 옆자리에 같이 앉은 학우에 지나지 않는다. 꼭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일처럼 델마는 (본인이 기억하는 선에서) 생애 처음으로 겪어보는 ‘발작’에 의해 아냐와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진다. 델마만 존재하던 고독한 섬에 타인의 침범이 시작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발작이 연달아 일어나자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냐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둘은 델마의 금기사항을 몰래 깨는 공범이 되면서 한결 더 가까워진다.


잘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관계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냐와 함께 공연을 보게 된 델마는 발레 공연이 점점 고조될수록, 짙어지는 아냐의 스킨십에 숨이 차올랐다. 평온한 표정의 아냐와 달리 델마는 발작 증세까지 오는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급하게 복도로 빠져나왔다.


결국, 따라 나온 아냐와 키스를 하지만 델마가 먼저 자리에서 벗어난다. 가까워지는 듯했던 둘의 관계는 다시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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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면으로 델마가 교회로 가서 회개를 하듯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여전히 종교적인 이유가 델마의 발목을 붙잡았고, 두 사람이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막았다.


이후에 파티가 있었다. 여기서 델마는 필사적으로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중 하나가 일부러 아냐의 친구인 남성과 함께 갔다는 점이다. 아냐를 계속 피해 다니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는 듯 계속 술을 마신다.


델마는 대마초(인 줄 알았으나 담배)를 빨고 잠시 눈을 감는다. 몽롱해진 정신 너머로 그토록 밀어낸 아냐와 키스를 하며 진득한 스킨십이 계속 이어진다. 영화 초반에 한 번 등장했던 뱀이 다시 등장한다. 뱀은 델마의 목을 조르고, 입속으로 들어가면서 델마의 전신을 모두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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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에서 이브를 유혹한 뱀을 연상시킨다. 여전히 예수를 믿고, 초인적인 힘을 인식하기 전인 델마에게 있어서 아냐의 존재는 뱀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아냐를 만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금욕적인 생활을 이어져 온 델마에게 아냐와의 모든 행위는 뱀이 건넨 유혹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나비가 애벌레였던 과거의 옷은 벗고 화려한 날개를 펴는 것처럼 델마도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날갯짓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밤늦게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 보는 등 소소한 금기를 깨고, 본인만의 삶을 찾아간다.


결코 아냐는 창세기에서 나오는 뱀이 아니다.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거짓으로 만들어 낸 환상이다. 알을 깨고 나오기 전에 느끼는 잠깐의 두려움에 지나지 않는다.



마녀사냥





델마가 첫 희생양이 아니다. 할머니도 델마와 비슷한 이유로 델마의 아버지로 인해 가둬진다. 델마의 힘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유전적인 원인에 기인한 것이다.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여성에게만 발현되는 능력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아무 능력도 없는 것에 비해 손녀인 델마에게는 전해졌다.


델마의 아버지는 본인의 부친을 갑자기 사라지게 한 엄마의 일을 겪으면서, 델마 또한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종교에게 의탁해 델마를 조종할 정도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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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에게 갑자기 찾아온 ‘발작’이란 증상은 몇 세기 전의 역사에서 여자 혐오를 당연시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다. 직접 눈에 보이는 신체 질환과 달리 정신질환은 의학적으로 발달되지 않은 과거 사람들에게 신이 나 악마와 관련된 미신적 행위 중 하나로 느껴졌을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은 서양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다. 십자군 전쟁과 같이 그 중심에 서 있기도 하고, 기본 이념과는 달리 왕의 권력을 누리며 천하를 다 가지기도 했다. 끊임없는 총성 소리와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자연재해로 먹을 것조차 부족한 삶 속에 인간은 신에 의지했다.


하지만, 간절한 기도에도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이건 모두 악마의 소행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혼란으로 어지러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건 ‘성경’에 적힌 말들이었고, 허상뿐인 공포의 대상을 직접 처단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배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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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교황청에서 이단 잡기에 혈안이었다. 악마와 이단을 결합시키면서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정확한 증거도 없이 소문만으로도 진행되는 종교재판의 희생양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앞서 언급한 <창세기>에서 아담의 일부에서 떼어내 만들어졌다는 이브. 뱀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경고한 선악과를 아담이 먹도록 유혹했다고 나와있다. 그로 인해 이브는 출산 시에 끔찍한 고통을 갖게 되는 형벌을, 아담은 힘겹게 먹고살아야 하는 노동의 형벌을 얻게 되었다.


결국, 성경에서 바라보는 여성은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약한 존재였고, 그 당시 성직자는 전부 남성이었기에 여성은 멀리해야 하는 위험인물이었다.


*


피해자 대부분이 50대 정도의 여성으로 그 당시로 치면 노년층에 해당하는 나이다 보니, 치매와 같은 뇌질환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의학이 아닌 신학이 중심이던 시대에 정신 이상 증세는 보통 사람과 다른 특수한 행동으로 분류되고,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이단’으로 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중에서도 발작 증세는 공포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악마가 육체에 깃드는 모습이랑 매우 유사하다. 과거에는 그와 같은 증상이 여성한테만 나타난다고 생각했기에 ‘마녀사냥’의 희생양은 이름에서 예상할 수 있지만 대부분 여성이었다


우리가 흔히 결혼 적령기에 결혼을 안 하는 여성들을 비하할 때, ‘노처녀 히스테리 부린다’라는 말을 많이 썼다.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언론과 방송에서도 많이 썼었는데, 결혼 적령기가 늦춰지고 비혼주의가 대세가 되면서 저 발언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노처녀 히스테리’에서 ‘히스테리(Hysterie)’도 여성을 낮은 존재로 생각했기에 만들어진 단어이다. 히스테리성 증세는 히포크라테스와 그 학파가 기재하였고, 여성에게서 많이 볼 수 있으며, 자궁에 병인이 있다고 생각된 데서 자궁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hystera를 따서 이름이 붙었다.


고대 그리스와 관련된 철학가들의 사상만 봐도 얼마나 여성 혐오적인 지는 잘 알 수 있으니 저런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영화에서도 언급했는데, 시대에 따라 남들과 다른 힘은 신의 계시 또는 악마의 유혹으로 생각한다. 가장 잘 알고 있는 ‘잔다르크’로 알 수 있다. 전쟁의 승리까지 이끈 명장이자 샤를 7세가 왕 자리에 앉도록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샤를 7세 외 귀족들은 잔다르크의 인기를 시기해 절벽 끝으로 내몰았다. 잉글랜드에서는 몇 번의 재판 끝에 이교도의 죄를 뒤집어 씌우며, 사제를 거치지 않고는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없다고 잔다르크를 마녀로 몰아 화형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잔다르크는 국가에서 필요할 때에는 천사의 음성을 들은 영웅이지만, 이제 원하는 걸 갖게 된 왕에겐 앞길을 막는 눈엣가시였다. 잔다르크에게 패배하게 된 잉글랜드 입장에서도 복수가 필요했고, 귀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잔다르크를 이단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을 종합해봤을 때, 오프닝에서 아버지의 총구가 사슴이 아닌 딸인 델마에게로 향한 것은 ‘마녀사냥’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능력을 가진 딸을 종교로 억압하기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면? 델마가 무의식적으로 동생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냥의 끝



재판대에는 델마의 아버지가 올라왔고, 불에 타 죽는 자 또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죽인 딸, 세 어절로 이루어진 문장은 영화를 모른다면 패륜을 저질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검색해봐도 친부나 계부에 의한 가정폭력이나 성범죄가 더 만연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델마의 행동이 오히려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완전한 해방을 이룩한 델마는 신 그 자체로 보인다. 델마의 초능력은 사실상 전지전능하다. 델마의 힘을 통해 델마의 엄마는 다시 걷게 된다. 누가 됐든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별거 아닌 걸로 넘어갈 수 있지만 델마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가라는 것 또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시대의 흐름과 여론에 따라 여성은 추앙받기도 하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다. 모든 신이 남성이라는 명제가 이미 사람들 생각에 박혀있다. 신학에서는 성경에 적힌 글 때문에 여성은 사탄에 쉽게 지배당하고, 세상을 타락시키는 대상으로 취급했다.


이런 이유로 국가적으로든, 작은 마을 내에서든 나쁜 일이 발생하면 여성에게 다 뒤집어씌우며, 말도 안 되는 이유들로 수 세기 동안 많은 희생을 치렀다.


델마는 그 생각을 뒤집듯, 당신들이 그렇게 믿는 종교의 신들은 여성이 될 수도 있다는 다른 발상의 여지를 주었다. 여성의 힘이 커지자 당연하게 믿었던 사실들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종종 단군이 여자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아리아나 그란데의 'God Is Woman'과 같은 생각들이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큰 파급력을 주고 있다. 대자연을 뜻하는 'Mother nature'에도 'Mother가 들어간다. 만물의 근원은 여성이라는 것. 나는 그래서 오히려 모든 위대한 존재가 여성이었기에, 머나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자격지심으로 여성에게 주어진 자유와 기회를 악착같이 빼앗으려 했던 것일까.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 중에 엄마, 아내, 누나, 여동생 등의 생각을 마치 본인이 발견해낸 것처럼 주장한 남성들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지금까지 남성의 이름으로 쓰인 역사 중에 여성의 이름으로 쓰였어야 할 역사가 얼마나 많았을까.



-해당 리뷰는 네이버 블로그에도 동시 게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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