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에 죽기를 희망하다

by 은예진

갱년기에 호르몬 치료를 받지 못한 탓에 비뇨생식기가 위축되어 만성 방광염에 시달리고 있다. 방광염뿐만 아니라 이명, 두통, 전정신경염, 고혈압등 갖가지 질환을 달고 살다 보니 끼니마다 약을 한 주먹씩 털어 넣는다. 삼십 대에 발병한 유방암은 수술과 방사선 치료로 완치되었지만 그게 갱년기가 되어서 문제를 일으킬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유방암 병력만 아니면 호르몬제 복용으로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거의 매달 찾아오는 방광염으로 온몸이 조여 오는 듯한 통증에 시달릴 때면 삶에 의지가 꺾인다. 한 달에 적게는 열흘 많게는 보름씩 항생제를 먹어대니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두렵기조차 하다. 그럴 때면 빨간 망토를 덮치는 늑대의 검은 그림자처럼 우울이 목덜미를 감싸고돈다.


특수 청소부 김완이 쓴 ‘죽은 자의 집 청소’를 보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가 남긴 흔적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 수 있다. 어떤 식이라도 죽음은 산 사람에게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뒤처리는 살아 있는 이의 몫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나와 특별한 관계도 없는 낯선 타인에게조차 민폐를 끼친다. 그걸 생각하면 함부로 우울이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좀비처럼 희끄무레한 눈빛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터덜거리며 중년의 시간을 걸어 나가고 있던 내가 문득 일흔이라는 나이를 떠올렸다. 두보는 곡강이수(曲江二首)라는 시에서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노래하며 칠십 살기가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여성 평균 기대수명 팔십육 세, 사고사를 제외하면 구십이 세까지 산다는 지금은 노년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예전과 달라서 일흔까지 산다고 호상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흔이 드물다는 뜻의 고희를 생각해 보면 또 크게 미련이 남는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쉰다섯 살이니까 앞으로 십오 년만 살면 일흔이 될 수 있는 거다. 완경 되고 십 년 가까이 고생했는데 앞으로 십오 년 정도의 고생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일흔이라는 나이의 발견은 돈오(頓悟)와 같이 정말 홀연히 나를 사로잡았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남들에게는 부정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일흔의 죽음을 떠올리자 새로운 가능성이 나를 찾아오면서 남은 십오 년의 시간이 다르게 보였다. 삶이 가진 유한성을 숫자로 명확하게 보여준 일흔. 일흔 까지는 아무리 아파도 힘들어하지 않고 생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는 의욕이 일었다. 한정된 시간 십오 년은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흔에 죽기를 희망한다는 나의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듣기도 전에 죽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상기시키며 비웃는다. ‘내가 빨리 죽어야지.’라고 푸념하는 노인들의 거짓말과 다를 바가 없기에 충분히 놀림받을만하다. 아무리 일흔에 죽기를 희망한다고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건 남들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희망조차 할 수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을 수는 없어도 죽기를 희망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희망하는 순간 희망 앞에 놓인 시간은 예전의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꽃 같은 시간이 되어 더욱 소중해지는 마법을 경험하게 되었다.


소중한 것은 결코 함부로 하지 않는 법이다. 이제 나는 죽음의 희망 앞에 놓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다 보면 아마도 일흔이 넘어서도 살아갈 힘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역설적이게도 일흔에 죽기를 희망한 순간 죽음과 가장 멀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