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폼페이 최후의 날
사흘 전 본이는 소향을 찾아갔었다. 다방골 기생촌에서도 소향이가 사는 집은 가장 눈에 띄지 않게 후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형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대정 권번에서는 검은 나비가 사라진 자리에 소향이를 새롭게 하얀 나비로 만들어 내보냈다. 검은 나비와 하얀 나비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대정 권번의 나비라는 말만으로도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졌다.
덕분에 소향이도 다시 일하는 재미를 얻었다. 하얀 나비의 장기는 엔카 풍 유행가였다. 인기의 여세를 몰아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책을 읽는 기생보다는 노래를 부르는 기생이 상대하기도 쉽고 술자리 분위기도 더 잘 살릴 것이다.
“검은 나비 아닌가? 어쩐 일인가? 자네는 이제 나 같은 사람은 감히 어울리지도 못할 인물이던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아무리 기고 날아도 어찌 형님 발치를 따라가겠습니까.”
“흥, 하여튼 자네 말솜씨를 누가 따라갈까. 나야 그 언사에 홀려 목숨을 부지하기는 했지만 말일세.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소향은 본이의 인사치레가 밉지 않은 듯 눈을 흘겼다. 정이 많은 소향은 자신이 망가지지 않게 붙들어준 본이가 고마워 지금도 종종 입에 맞는 음식을 발견하면 사람을 시켜 살롱으로 보내주곤 했었다. 대정 권번 행수가 소향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은 이면에는 그러한 소향의 마음 씀씀이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제가 사람을 한 명 이리로 보내면 혹시 좀 숨겨 주실 수 있으세요?”
“독립 운동하는 사람인가?”
“그걸 어떻게?”
“검은 나비야, 장난하니? 그럼 네가 나한테 도둑놈을 감춰 주라고 하겠니? 아니면 살인자를 감춰 주라고 하겠니? 뻔한 일이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고 나한테 부탁하는 것이냐?”
“괜찮습니다. 이런 부탁을 하려고 온 제가 미친년이지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내가 언제 거절했느냐? 나는 네가 알고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인지 그걸 물었지!”
“압니다. 이런 일은 자칫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일입니다. 절대 아무에게나 하는 부탁이 아닙니다. 숨겨준 사람도 위험해질 수 있지만 숨겨준 사람이 신고할 경우도 있어서 아무에게나 부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왔느냐?”
“첫째는 이곳이 제가 보기에 경성 한복판에 있어서 의심스럽지 않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좀 멀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니 등잔 밑이 어두울 수 있게 하는 곳이지요. 둘째는 소향 형님은 사랑 때문에 죽으려 했던 사람입니다. 사랑 때문에 죽으려 했던 사람은 나라를 위해 일하다 숨어 들어온 사람을 함부로 신고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요. 셋째 설사 걸린다 해도 기생이 기둥서방 끌어들인 거라고 발뺌하면 형님이 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네가 아주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네?”
“너는 지금 그 이유로 나를 꾀는 거잖아. 목숨 걸고 누군가를 숨겨주라고 말이야.”
본이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손에 끼고 있던 알이 굵은 진주 반지를 빼서 소향의 손에 끼워 주었다.
“형님, 같은 조선 사람으로 부탁해요.”
“닥쳐라, 이년아! 같은 조선 사람으로 애국심에 호소하려는 년이 뇌물을 꺼내느냐? 네가 아주 나를 우습게 보는구나? 당장 이거 집어넣어라! 나쁜 년!”
소향이 욕을 해대며 소리를 질렀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 품이 독립운동하다 숨어 들어온 남자 하나쯤 품어줄 넓이는 된다. 그런데 아주 품어도 되는 것이지? 너하고 상관있는 남자는 아니지?”
“형님!”
소향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본이의 근심도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형님, 이건 언제까지나 예비 사항이라 그분이 오게 될지 어떨지는 몰라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예비해 두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유성준이라는 분이 오면 받아나 주세요.”
“알았다. 알았어! 누군지 몰라도 네가 어지간히 신경을 쓰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