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아, 내 사랑아
사이토 총독은 죽지 않았다. 죽기는커녕 총도 맞지 않았다. 혼마치의 생일 축하연에 사이토의 제복을 입고 들어와 죽은 자는 가짜 사이토였다. 사이토는 헌병 정보조직으로부터 의열단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미 유성준이 민영식을 대신해 칼을 맞을 때부터 의열단의 작업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혼마치에게 정보가 넘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사이토는 자신이 처리하고 싶은 혼마치와 의열단을 한꺼번에 치우고 싶었다. 언제부터인지 혼마치가 총독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감지되었다.
사이토가 보기에 혼마치는 제 털 뽑아 제 구멍 박기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고지식한 인물이 어떻게 자신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가소로울 뿐이었다.
사이토는 의열단에 심어둔 밀정의 보고를 통해 혼마치 생일이 디데이라는 것을 알고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들도 저격에만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무기고 탈취까지는 알지 못했다. 혼마치의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임명된 새 경무국장 요시다는 의열단 탕진을 목표로 경무국 전체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연회장의 피격 사건으로 사이토 총독의 대역을 맡은 장교와 혼마치, 그의 양아들 민영식이 죽었다. 경찰이 쏜 총에 홍정순이 죽었고 하객 중 경무국 직원 부인 한 명과 혼마치의 손자가 크게 다쳤다. 그 외에도 총상과 유리창 파손으로 인한 경상자도 몇 명 있었다.
경찰은 그 자리에 있던 일본인들은 돌려보내고 조선인들만 따로 구금했다. 신원 확인 절차를 다시 거치며 의심 인물들을 분류하는 과정에 본이는 주범 격으로 몰려 취조실로 불려 갔다.
흐릿한 전등만 하나 매달려 있는 취조실에는 단순하게 책상과 의자뿐이었다. 본이는 총알을 피하는 과정에 밍크 숄을 놓쳐서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 차림으로 끌려왔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구두 굽은 하나가 부러져 걸음 걷기도 쉽지 않았다.
본이는 자신이 이가 부딪치게 떠는 이유는 드러난 어깨 때문에 추워서 그렇지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취조실이 고문실은 아닐까 싶어 지레 겁을 먹었는데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이본느? 웃기는군. 본명 이본, 충청도 연기면 출신이군. 당신 유성준과 홍정순을 어떻게 알았지? 같은 의열단 출신인가?”
고무라 형사는 고개를 들어 본 이를 바라볼 생각도 하지 않고 서류만 보면서 질문했다.
“두 분은 저희 살롱 손님입니다.”
“살롱 좋아하시네. 거기 의열단 근거지잖아. 우리가 몰라서 가만히 있었던 줄 아나? 제대로 잡아들이려고 기다린 거지.”
고무라 형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서류로 테이블을 후려쳤다. 그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길고 긴 비명이었다. 본이는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눈을 꼭 감았다.
유성준이 유리창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다음에 무사히 도망간 것인지 잡힌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디 저 비명이 유성준의 것이 아니기를 빌었다. 갑자기 거친 손이 다가와 본이의 손을 낚아챘다.
“잘 들어두라고. 곧 네가 낼 소리니까.”
본이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본 고무라가 코가 닿도록 얼굴을 들이밀고 히죽 웃었다. 지독한 입 냄새가 나
는 웃음이었다.
“입 냄새나니까 더러운 얼굴 좀 치워 주시지.”
본이가 쏘아붙이자 안색이 변한 고무라 형사가 서류철로 본이의 얼굴을 후려쳐다.
“내가 웃으며 말하니까 이게 지금 어떤 상황인 줄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유성준이 어디 있어?”
그 말에 본이의 긴장이 일시에 풀렸다. 유성준은 아직 잡히지 않은 것이다. 김 군이 용케도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손님들 일상까지 모두 꿰고 있어야 합니까. 저는 민영식 씨와의 친분으로 그 생일 축하연에 간 것이지 다른 사람들하고는 관련 없는 사람입니다.”
심문은 사람을 바꿔가며 계속되었다. 창이 없는 방에 전등불은 24시간 켜져 있으니 그 자리에 앉아 얼마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졸면 뺨을 때려 깨웠고 가끔 주먹밥을 한 개씩 던져 주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과정에서도 본이는 그들이 실제로 자신을 옳아 맬 증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