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아, 내 사랑아
소향은 딱 한 번 음식과 함께 성준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무사히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글이었다. 본이는 시월이를 통해 대정 권번으로 답례 음식을 보내면서 유성준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의 연락이 있을 때까지 무조건 숨죽이고 있으라는 당부였다.
과연 유성준이 그 당부를 지킬지는 모를 일이었다. 본이 또한 날마다 소향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성준이 살기 위해서는 그도 본이도 참아야 했다.
오늘도 장연수가 살롱을 휘저으며 소란을 피운다. 본이가 자기 마누라라며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걸핏하면 본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견디다 못한 본이가 보이를 시켜서 장연수를 끌어내는 것이 한두 번이 아녔지만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술을 마신다.
“당신 최 집사 소식 안 궁금한가? 그 자식이 아들을 낳았어요. 벌써 몇 번째 아들인지 몰라. 그런데 나는 뭐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우리도 어서 이천으로 돌아가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시월아?”
장연수가 다리를 탁자 위에 걸쳐 올려놓고 또 시월이까지 불러댔다. 주방에서 일하던 시월이가 보다 못해 튀어나오려는 것을 본이가 막아섰다.
“내버려 둬. 우리가 흥분하면 할수록 더 그러는 사람이야. 내버려두면 제풀에 포기하고 잠들어. 그때 내다 버리면 그만이야.”
시월이가 장연수를 째려보자 저런 계집애를 보았느냐며 투덜댄다. 이제 장연수 때문에 살롱에 오지 못하겠다는 사람마저 생겼다.
부용지에 봄이 왔다. 본이는 못 견디게 유성준이 보고 싶은 날은 부용정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부용정 지붕에 눈이 녹는 것을 보았고, 부용지 얼음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버들강아지 물오르는 것을 보았고 담벼락 아래 꽃다지 올라오는 것도 보았다. 개나리 꽃망울 터지고 진달래꽃 피는 날이 되었지만 아직 그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본이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부용정 근처를 거닐며 언제쯤 그를 찾아가도 될까 헤아리고 있을 때 점잖은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 와 길을 물었다.
“아가씨, 여기서 영화당을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좀 알려주시겠소?”
본이가 앞장서서 영화당 쪽으로 갔다. 이쪽으로 가시면 된다고 말하며 되돌아보는데 할아버지가 갑작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그녀가 노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흰머리에 모자를 눌러 쓰고 안경을 쓴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는다. 본이는 그대로 노인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노인은 마치 아버지라도 되는 듯 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인의 품에서는 오래 묵은 서책에서 나는 본이가 좋아하는 냄새가 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꽃구경 나온 사람들이 흘끔거리는 것을 눈치챈 노인이 본이를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본이는 유성준이 밖으로 나오기에는 아직 이르다며 좀 더 기다리지 못한 것을 타박했다. 하지만 성질 급한 유성준은 지금까지 기다린 것도 본이를 생각해서 참고 또 참은 것이라며 유세를 했다.
“선생님, 마치 저를 위해 숨어 있었던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본이가 입을 삐죽거리자 앞장서서 걷던 그가 갑자기 뒤돌아서서 본이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당연한 말이오. 나는 당신이 없었으면 절대 그곳에서 그렇게 숨어있지 않았을 것이요.”
민망해진 본이가 고개를 숙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만 없었으면 다시 한 번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창덕궁 밖에는 유성준이 타고 온 김 군의 인력거가 서 있었다. 본이는 망설이지 않고 인력거에 올라타 목적지를 이야기했다.
“김 군, 혹시 나랑 처음 만났던 그 자리 기억하나 모르겠네. 내가 경성에서 제일 인기 좋은 기생집으로 가자고 했던 그 길 말이오.”
“그럼요, 기억하다마다요. 일성 여관 아닙니까. 제가 아씨 같은 분을 처음 만난 자리를 어찌 잊어버렸겠습니까.”
“그리로 가주시게.”
“예이, 알겠습니다.”
김 군이 경쾌하게 달린다. 유성준은 본이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다정한 부녀 사이 마냥 서로 마주 보고 있을 뿐이다.
유성준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영리하고 재기 넘치는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고, 본이는 본이를 보호한답시고 제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만 결국은 매번 본이의 도움을 받고 마는 남자의 눈을 들여다본다. 본이의 손이 핼쑥해진 유성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어 내리더니 한마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