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랑새의 죽음

사랑아, 내 사랑아

by 은예진

“소향 형님이 아무래도 쌀값이 아까웠나 봅니다. 어찌 이리 마르셨대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대가 나를 다방골에 처박아 두고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사내 녀석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서 푸대접받았지 뭡니까.”


“앞으로는 제가 도로 살찌워드리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는다. 본이는 유성준이 살아서 이런 날을 맞이하게 된 것이 꿈만 같았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본이가 경성에서 처음 묵었던 일성 여관이다. 여관 여주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심하게 방을 안내해 주고 돌아선다.


문을 닫고 유성준과 본이가 마주 섰다. 낡은 이불이 한 채 깔렸고, 주전자와 컵이 머리맡에 놓인 방은 예전에 본이와 시월이가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누추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 방은 본이의 기억 속에 있는 그 방이 아니었다.


지금 두 사람에게 방의 모양새 따위는 관심거리가 아니다. 본이는 자신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성준의 귀에 들릴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침이 넘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매번 본이가 그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렇게 뻔뻔하면서도 침 넘어가는 소리가 부끄럽다니 이건 또 뭔가 싶었다.


유성준이 가발을 벗었다. 흰색 가발 속에서 눈부시게 검은 머리가 나왔다. 본이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보았다. 유성준이 본이의 손을 잡아끌어 꼭 쥐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손등에 닿자 본이는 손등에서 꽃잎이 튀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이 닿은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봄처녀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흩어지는 듯했다.


한참을 손등에 입을 맞춘 채 멈추어 있던 유성준이 천천히 그녀를 가슴에 안았다. 그의 품에서는 한결같이 본이를 추억에 잠기게 하는 바로 그 냄새가 난다. 어째서 그에게서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서책 냄새가 나는 것일까? 어쩌면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를 자기가 좋아하는 냄새로 치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무슨 상관인가. 본이는 가슴을 부풀려 그의 냄새를 잔뜩 들이켰다.


“보고 싶었소.”


유성준은 마치 누군가 들으면 안 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본이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살아주셔서 감사해요.”


본이의 촉촉하게 젖은 눈을 바라보던 유성준은 가만히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대로 온 세상이 두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시간이 흘렀다.





가늘게 코를 골던 유성준이 눈을 떴다. 그사이 본이는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을 보고 있었다. 민영식의 칼을 대신 맞은 어깨의 상처와 총알이 스친 허벅지의 상처, 유리에 베인 옆구리까지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본이는 그 상처에 입술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상처를 입던 당시 유성준이 느꼈을 법한 통증이 그녀의 몸에도 전달되었다. 옆구리가 쿡쿡 쑤시고 다리가 저렸다. 그녀의 기척에 눈을 뜬 유성준이 팔을 벌려 본이를 꽉 껴안았다. 그의 입술이 본이의 귓가를 간질였다.


“우리 같이 만주로 갈까요?”

“같이 갈 수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유성준은 이대로 홍정순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라도 사이토를 죽여야 그에게 놀아났다는 수치심을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 본이를 품에 안고 있으려니 그녀와 같이 후일을 도모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만주에서 이회영 선생을 찾아갈 수도 있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단 며칠만이라도 세상을 잊고 소박한 사랑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본이는 여관 주인 여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유성준을 위한 밥상을 차렸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흰밥에 조기 한 마리를 굽고 봄 냄새 가득한 냉이를 된장에 풀었다. 참기름을 듬뿍 뿌린 겉절이를 무치면서 왜 사람들이 신혼부부의 모습을 볼 때마다 깨소금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밥상 앞에 앉은 유성준이 조기 살점을 떼어 본이의 숟가락 위에 올려놓았다. 본이는 그걸 입에 넣고 씹으면서 왜 이렇게 발가락이 손가락이 간질거릴까 생각했다. 그건 마치 언 땅이 녹으면서 새싹을 틔울 때 느껴질 법한 간질거림이었다.


낮에는 서로 얼굴을 들여다보며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했다. 본이가 전기수를 따라 장터를 쏘다니다 오라버니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수작을 부리던 이야기를 듣고 유성준이 배꼽을 쥐며 웃었다. 그는 여기저기 널린 아버지의 여자들과 그 여자들의 자식들 틈에서 느꼈던 분노와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웠던 마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 때문에 마음 아픈 여자는 어머니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소.”

“어머니가 이제 당신은 그 일에 지쳤으니 저보고 가져가라고 했어요.”


유성준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정말?”


본이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큰소리쳤다.


“그럼 내가 거짓말할까 봐 그러세요?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한번 물어보시지요.”


그건 말이에요. 꼭 말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여자들은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요. 본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알 턱 없는 유성준은 자신의 어머니가 본이가 마음에 걸린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내며 언제 두 사람이 만나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날 밤 본이는 파랑새를 쫓아 맨발로 풀숲을 헤치고 다니는 꿈을 꾸었다. 발이 가시에 찔렸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파랑새는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빠져나갔다. 막 새를 잡았다고 느꼈을 때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겁에 질린 본이가 뒷걸음질을 쳤다. 발밑에 파랑새가 피를 흘리며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본이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다시 총알이 날아왔다. 깜짝 놀란 본이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파랑새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의 옆에는 유성준이 곤히 잠들어있었다.


본이는 흥건하게 젖어 있는 목덜미를 손등으로 훔치며 어깨를 떨었다. 유성준과의 행복한 시간을 위협하는 이 어두운 그림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본이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유성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잠결에도 그는 팔을 벌려 본이를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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