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봄소식

사랑아, 내 사랑아

by 은예진

소향은 유성준이 머무르던 방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의탁하고 있는 내내 소향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고 무던 애를 썼다.


그런 유성준의 모습이 더 섭섭했다. 검은 나비와 유성준의 사이가 예사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에게 그토록 선을 그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철벽 같은 남자의 모습이 소향의 마음을 더 뒤흔든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끝까지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하다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빈 몸으로 왔던 유성준은 다시 빈 몸으로 떠났다.


상처 난 유성준의 몸을 치료하고 보살피며 소향은 자신의 마음에 난 상처를 회복시켰다. 절대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던 마음에 새살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은 받는 것인 줄만 알았기에 그 사랑을 잃었을 때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유성준을 보살피며 다른 사랑에 대해 배웠다. 주는 사랑이 무엇인가 알게 되면 그 사랑은 남녀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향은 검은 나비가 자신을 두 번 일깨웠다고 생각하며 쓴웃음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부르기로 한 영화 주제가 낙화유수의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 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 이러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소향은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부모 잃고 배곯는 아이들이 될 수도 있고, 자식 잃고 외롭게 늙어가는 노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성준이 있던 방의 문을 닫다 말고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남자는 떠났지만 방은 비어있지 않았다. 유성준이 나가 서 있곤 하던 양지가 조금 더 커진 것만 같았다. 이 집에 언제부터 해가 이렇게 잘 들었나 싶어 소향도 그 햇살을 따라 걸었다.






“그러니까 우리 아씨가 온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아, 오실 수도 있고 안 오실 수도 있지. 하지만 아씨는 그곳에 더 계셔야 해.”

“왜? 우리 아씨가 일성 여관에 계셔야 하는데? 여기는 어쩌고? 너 진짜 말 이리저리 돌릴래?”


시월이와 김 군이 아까부터 실랑이를 하고 있다. 흥분해서 씩씩대는 시월이와 달리 김 군은 싱글거리며 웃고 있다.


“그게 말이야 아씨는 지금…… 에이 나는 차마 말을 못 하겠다.”


“이게 정말 좋게, 좋게 말하려니까 장난하니? 너 진짜 바른대로 말 못 해? 안 되겠다 너 나랑 같이 일성 여관으로 가자. 가서 내가 직접 아씨를 만나야겠다.”


“알았어,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김 군은 목소리를 낮추고 아무도 없는 방을 두리번거리면서 공연히 분위기를 잡았다.


“유 선생님이 찾아오셨어. 그래서 두 분이 그곳으로 가신 거야. 그러니 너는 좀 모른 체하고 있어.”


갑자기 시월이의 얼굴이 시월 단풍나무 잎처럼 붉게 변했다.


“그럼 지금 두 분이 같이 여관에 있다는 말이야?”

“그렇다니까. 그러니 우리는 그저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면 돼!”


“어이구! 우리 아씨 팔자는 이게 뭐야. 오징어 같은 장연수한테 시집갔다가 쫓겨 나온 것도 모자라서 이제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남자랑 계시다니 정말 내가 못 살아. 못 살아.”


“야, 우리 유 선생님이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데 그렇게 말을 하냐?”


“뭐? 우리 유 선생님? 네가 언제부터 그 양반을 안다고 우리 유 선생님이라고 하냐? 말해봐. 너는 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시월이가 김 군의 옆구리를 꼬집자 김 군은 과장되게 소리를 지르며 온몸을 꼬았다.


“그럼 너는 네 아씨가 어떤 남자를 만나기 바랐냐?”


“그야 제 처자식 잘 보살피고 살 만한 듬직한 남자 만나 알콩달콩 아이 재롱 보며 살기를 바랐지. 시절이 그렇게 살기 어렵다고 해도 평범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잖아!”


“그래? 나는 그런 남자 하나 알고 있는데. 알려주랴?”


“지금 우리 아씨가 유 선생인지 뭔지 그 양반하고 있는데 이제 그런 남자 알아서 뭐 하게!”


시월이가 쏘아붙이자 김 군이 빙글거리고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뭐, 네 아씨만 여자냐? 너도 여자지!”

“이게 정말! 내가 지금 너랑 우스갯소리하고 있을 기분인 줄 알아?”


“나도 우스갯소리 아니다 뭐. 이래 봬도 내가 보성전문 졸업반이다. 내가 졸업하면 너 하나는 먹여 살리고 알콩달콩 살 수 있다 이거야.”


“뭐가 어쩌고 어째?”


시월이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얼굴은 이제 단풍잎을 넘어서 달아오른 숯덩이처럼 붉어졌다.


“시월이 너는 언제까지 아씨 뒤치다꺼리만 하고 살 거 아니잖아. 너도 시집가서 아이 낳고 살아야 할 거 아니냐?”


“웃기지 마라. 나는 평생 아씨만 보고 살 거다. 네까짓 것이 뭘 안다고 참견이야? 당장 나가지 못해! 그러나 저러나 우리 아씨는 정말 유 선생님하고 그 여관에서 살림이라도 차린 거야 뭐야!”


시월이는 민망한 마음에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김 군은 누가 봐도 괜찮은 청년이다. 인력거를 끌어가며 전문학교에 다니는 성실한 청년이면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유성준처럼 자기 몸을 내던질 만큼 독립운동에 투신하지는 못하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도울 거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시월이는 김 군이 썩 괜찮은 청년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느물거리며 다가오는 그를 남자로 대하자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평소에 얌전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내숭이라도 떨어 볼 텐데 왈가닥인 것을 다 아는 처지에 어찌할 바 모르겠으니 목소리만 커졌다. 김 군이 제발 목소리 좀 낮추라고 타박했지만 조절이 되지 않았다.


시월이는 김 군이 목소리 좀 낮추라는 소리가 자신이 왈가닥인 것을 부끄러워한다고만 생각해 노여운 마음이 들 뿐이었다. 설마하니 살롱 안쪽에 있는 집에서 엿들을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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