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아, 내 사랑아
살롱이 의열단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실제로 책 제목으로 암호 전달을 했다는 것은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고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구역질이 올라온다고 느껴졌지만 넘어올 만큼 먹은 것이 없었다.
몇 명의 수사관들이 들고 났는지 셀 수 없었다. 다시 처음 보았던 고무라가 그녀 앞에 앉았다.
“하여튼 조선 땅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이 모양인지 알 수가 없어. 여기가 내지만 되었어도 이따위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잘 들어라! 이본, 내가 지켜보고 있을 거다. 혼마치 국장님을 쏜 그놈은 내가 반드시 잡을 거니까 그리 알아라. 빌어먹을!”
고무라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바닥에 집어던지더니 본이의 팔을 잡아끌고 일어섰다.
“야, 이 여자 내보내.”
본이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냥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자 갑자기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햇빛이었다. 비틀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머리가 멍했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뼈가 다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녀는 경찰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붙잡아 인력거에 태웠다. 낯익은 여인이었다. 누군가 생각하려 했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본이는 의식을 놓으면서 혹시라도 자신이 유성준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풀려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아씨, 이제 정신이 좀 드셨어요?”
시월이가 퉁퉁 부은 눈으로 본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본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가녀린 손 하나가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어 보자 그녀였다. 이제 본이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고생 많았어요. 우리 성준이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래요.”
성준의 어머니는 어떻게 본이를 빼내 올 수 있었는지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총독이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통해 혼마치를 치고 의열단을 잡으려 한 것은 성공했다. 하지만 경무국장이 공격당할 것을 알면서 방조한 것, 아니 피습 정보를 독점한 것이 알려지면 총독의 입장에서도 곤란한 일들이 한둘이 아녔다. 유철호 회장은 발 빠르게 그 점을 이용했다.
불만세력과 혼마치 측 인물들에게 입을 다무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느낄 만큼의 돈을 안겨주었다. 사이토와 유철호는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회장님은 성준이가 일으킨 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어요. 그리고 이제 성준이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지요. 하지만 회장님도 내 마지막 청은 거절하지 못했지요. 나는 아가씨가 성준이 때문에 그곳에서 잘못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가씨를 꺼내는데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지 않은 것을 보면 저들도 아가씨를 붙들고 있을 명분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던 모양이에요.”
본이는 만약 민영식이 살아 있었더라면 자신을 쉽게 풀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영식이 죽지 않았다면 홍정순을 생일 축하연에 끌어들인 사람이 본이라는 것은 쉽게 탄로 날 일이었다. 본이는 어쩌면 유성준이 민영식에게 총을 두 발이나 더 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성준의 어머니는 본이의 손을 잡고 말을 이었다.
“아마도 이게 아가씨와 내가 만나는 마지막이 될 거예요. 앞으로 나는 성준이도 아가씨도 볼 일이 없겠지요. 나는 그 아이의 친모가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그 아이만큼 사랑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가끔 나는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내가 회장님과 결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지요. 만약 말이에요. 만약 그 아이를 만나게 된다면 어미는 만나지 못해도 괜찮으니 살아만 달라고 전해 주세요. 살아만 있으면 보고 싶은 마음 따위는 전혀 상관없으니까요.”
본이는 대답 대신 그녀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어 본이가 다시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뚫어지고 바라보았다. 유성준을 사랑하는 두 여자는 말로 전달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그 짧은 시간에 모두 주고받았다. 본이는 결코 이것이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