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아, 내 사랑아
하루를 쉬고 난 본이가 시월이를 불렀다.
“시월아, 내일부터 살롱 문을 열 테니 보이 다시 나오라고 해서 준비시켜라.”
“네? 어떻게 장사를 한다고 이러세요? 이게 말이 돼요?”
“문을 열어야 해.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의심에서 벗어난다.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살기 위해서라도 살롱 문은 열어야 한다.”
시월이는 도통 무슨 소리인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지금은 아씨의 말에 토를 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이가 갇혀있다 나온 사이 계절은 성큼 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난달부터 방송을 시작한 경성 라디오에서는 소향의 목소리로 취입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깜짝 놀
란 본이는 라디오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소향의 노래가 끝나자 아나운서가 그녀의 목소리가 벚꽃 핀 길을 걷는 것만 같은 달콤함이 있다고 칭찬한다. 본이는 소향이 부디 유성준을 제대로 보살피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소향은 남자의 등 뒤로 쏟아지는 햇살을 보고 있었다. 유성준이 서 있는 자리는 그 집에서 유일한 양지였다. 남자의 모습은 마치 그 양지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마당에 나가 있기에는 꽃샘바람이 차다고 말렸지만 남자는 들은 체하지 않았다.
신문을 본 남자는 이후로 잘 먹지도 않고 저렇게 서성인다. 유성준은 목적대로 혼마치를 죽였지만 그러한 일이 사이토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홍정순의 목숨을 바친 일이 이토록 허무하게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숨을 구한 본이가 경찰에 잡혀 있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다.
소향은 김 군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장난처럼 검은 나비에게 남자를 품어도 되겠느냐고 했었지만 자신의 마음이 실제로 움직일 줄은 몰랐다.
다시는 남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노라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검은 나비에 대해서 가지는 그 애틋한 마음을 느끼자 엉뚱하게 자신의 마음이 움직였다.
절대 표현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싹부터 밟아 버리려 애쓰고 있다. 소향을 날마다 남자의 흠을 찾느라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흠을 찾는 과정 자체가 남자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까지는 깨닫지는 못하고 있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유성준이 고개를 돌렸다. 한결 수척해진 모습이다. 살이 빠지자 반듯한 콧날과 드러난 턱선이 더욱 남자다워 보인다.
“김 군이 전하기를 검은 나비가 오늘 경찰서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소향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게 정말이오. 그럼 지금 당장 내 가봐야겠소.”
소향은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그럼 지금 당장 가셔서 다시 검은 나비랑 사이좋게 잡혀가시게요?”
그가 무르춤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선생님과 검은 나비가 다시 만나려면 세상이 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유성준은 대답하지 못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자주 어지러웠다.
이본느의 살롱은 이제 예전의 살롱이 아니다. 경성의 지식인들은 살롱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했다가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발길을 끊었다. 신일성은 새로운 장편 소설을 쓰느라 바쁘다고 했고, 이종필은 전시회가 있다고 했다.
가끔 홀로 찾아와 술을 마시는 김은철은 지난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들과 같이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이 죽었고 한 명은 경찰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들도 한 차례씩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기에 더욱 몸을 사렸다.
살롱은 그냥 평범한 양주집이 되었다. 예전에 찾아오던 경성의 예술가들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몰려와 거드름 피우며 술을 마신다. 본이는 이제 책을 가지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방에 꽂혀 있는 책은 그저 장식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본느를 칭송하던 사람들은 살롱이 예전의 살롱이 아니듯 이본느도 예전의 이본느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때면 본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혼자 울음을 삼켰다. 유성준의 어머니는 그가 살아만 있다면 만나지 못하는 것이 상관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만 만날 수 없다는 것은 고통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