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사람들
대정 권번 기생들을 비롯한 한성 권번, 경성 권번까지 오색찬란한 옷을 차려입고 양산을 든 기생들이 파고다 공원에 몰려들었다. 그녀들이 걸어가는 길마다 향긋한 분 냄새가 진동해서 구경꾼들은 코를 벌름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권번 기생들이 파고다 공원에서 시위한다는 소문이 퍼져 지방에서 기차를 타고 구경 온 사람들까지 있었다.
남자들은 평소에 소문만 듣던 대정 권번 금홍란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목을 빼 들었다. 구경꾼들은 무슨 미인대회라도 구경하는 양 한성 권번 아무개보다 경성 권번 아무개가 더 예쁘다는 둥 대정 권번 하얀 나비가 앞장을 서서 벌인 일이라는데 하얀 나비는 어디 있는 것이냐며 찾아다니기도 했다.
요릿집에 다닐 형편이 되지 않는 서민들은 호화로운 차림새의 기생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이 여간 큰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기생들의 숫자보다 구경꾼들의 숫자가 더 많아지면서 종로 거리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경찰들은 어여쁜 여인네들이 모여 서서 양산을 흔들기만 하고 있는 상황에 뭘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더군다나 몇몇 경찰들은 단골 기생들이 아는 척을 하는 바람에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생들은 양산에 자기 이름을 써 붙였다. 그걸 본 구경꾼들은 홍란이 예뻐! 진설이 최고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기생들은 그들의 환호에 보답하듯 치마를 돌려 감았다 풀었다 하며 눈을 깜빡이기도 했다.
하늘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면 갑자기 파고다 공원에 새로운 꽃밭이 생긴 것은 아닐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꽃들이 한꺼번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기생들 사이에 섞여 있던 소향이 어느 순간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목청껏 소리를 높였다.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선동적인 이야기를 해도 호소력이 있었다.
“여러분, 이 땅을 짓밟는 왜놈들의 만행에 대해서 더는 눈 감으면 안 됩니다. 오천 년 역사를 가진 우리 땅은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술자리에서 흥이나 돋우고 술을 따르는 기생의 몸이지만 우리도 이 땅의 백성입니다. 왜놈들은 물러가야 합니다. 왜의 총독은 제나라로 돌아가라 하십시오.”
기생들이 손뼉을 쳤다. 그리고 기생들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도 박수를 쳤다. 종로가 들썩거리고 경찰들은 이제 해산을 시키겠다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시간 유성준은 종로 경찰서 일 층에서 폭탄 투척 당시 현장 검증을 하고 있었다. 경찰들조차도 유성준의 현장 검증보다는 경찰서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생들의 시위에 정신이 팔려 있는 상황이라 고무라는 잔뜩 독이 올랐다.
김석중을 옭아매지 못해도 유성준을 잡은 것만 해도 일 계급 특진감이었다.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리며 일을 그를 칠 수 있다 싶어서 이제 재판에 넘길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고무라가 포승줄에 묶인 유성준의 팔을 바짝 쥐고 폭탄을 던진 곳에 서라고 소리 질렀다. 너무 오랫동안 좁은 공간에 갇혀있던 유성준이 제대로 걷지 못하자 고무라가 정강이를 걷어찼다.
유성준이 고꾸라지자 다시 일으켜 세워 폭탄을 던진 위치에 세웠다. 그때 밖에서 여자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파고다 공원에서 출발한 기생들이 구경꾼들을 몰고 종로 경찰서로 들이닥친 것이다.
경찰 서장은 오늘 하지 말라고 했던 일을 굳이 고집하고 있는 고무라가 그러잖아도 못마땅했던 참이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빨리 유성준이 데리고 들어가! 이 난리 통에 뭐 하는 짓이야!”
그럴수록 고무라는 고집을 피우고 서장에게 각을 세웠다. 유성준을 고무라가 잡았다는 것이 뭔가 못마땅한지 시비를 자주 걸던 서장의 말을 호락호락 듣고 싶지 않았다. 여자들의 함성이 점점 커질 즈음 경찰서 유리창으로 돌멩이 하나가 날아왔다. 와장창 소리가 나면서 유리가 깨지고 갑작스럽게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돌멩이가 아니었다. 연막탄이 종로경찰서 일 층을 가득 채웠다.
고무라는 유성준의 팔을 꽉 잡고 권총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곧 뒤통수를 가격 당하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유성준은 느슨하게 묶여있던 포승줄을 풀어 젖히고 고무라의 총을 움켜쥐었다. 현장 검증이 시작되기 바로 전 고무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그의 포승줄을 느슨하게 만들어놓았다. 그게 누구인지 유성준은 감잡을 수 없었다.
유성준이 총을 들고 일어서자 고무라를 가격한 자가 유성준을 이끌었다. 그는 이 사람이 본이를 데려갔던 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두 사람이 달리는 동안 밖에서 소총부대가 뛰어 들어왔다. 경찰서 안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