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사람들
노인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며 민망한지 머리를 흔들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는 이 양반들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싶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기차가 곧 출발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청년이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르신,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순간 노인의 눈이 노인의 것이 아닌 듯한 빛을 발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이 벌떡 일어섰다.
“내리겠습니다. 공부는 이곳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노인이 슬그머니 따라 일어서며 이거 차표를 환불받기는 어렵겠는데라고 중얼거렸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본 맞은편 자리 아주머니는 이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좋은지 신이 난 표정을 지었다.
기차에서 내린 청년은 병약한 할아버지를 부축하는 손자처럼 노인의 팔을 부축하고 걷기 시작했다. 기차역에 서서 눈물 콧물을 빼고 손을 흔들던 시월이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년은 시월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었다.
노인은 걸음 걷기도 힘겨운 듯 비틀거렸다. 총을 들고 오락가락 거리며 사람들을 살피는 헌병 앞에서는 허리가 점점 꼬부라져 기침까지 콜록거리며 한다. 그런 노인이 안쓰러운지 청년이 등을 두드리며 할아버지 좀 쉬 실래요를 반복한다.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걷는다.
한참을 걸어간 그들은 이제 인적이 드물고 어둠침침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노인은 서서히 허리를 펴더니 청년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 친다.
“냄새가 좀 심했지?”
“무슨 냄새가 난다고요?”
“내가 입은 옷이 양계장에서 일하던 사람의 작업복이거든.”
청년이 피식 웃더니 노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언제나 당신에게서 같은 냄새가 나요.”
노인이 무슨 냄새인지 묻고 싶은 표정을 짓는다. 청년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손수건 하나를 꺼낸다.
“이 손수건 주인에게서는 오래 묵은 서책의 냄새가 났어요.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에서도 그 냄새가 나지요. 나는 그 냄새가 좋아서 그가 가지고 있던 장옷으로 베개를 만들었지 뭡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 냄새가 다 달아나 버려서 보충이 필요해요.”
노인이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청년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냄새 보충은 그다지 어렵지 않겠는데.”
청년의 손이 노인의 목을 휘어 감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고 입술이 맞닿았다. 노인의 손이 청년의 허리를 꽉 껴안는다. 청년의 몸이 벽에 가 닿자 그가 아니 그녀가 속삭인다.
“고생 많았지요?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유성준이 본이의 입술에 코에 눈에 그리고 귀에 입을 맞추며 묻는다.
“그런데 어떻게 만주로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을 생각을 한 거지?”
“이제는 두렵지 않으니까요.”
“뭐라고? 이거 큰일 났는데. 나는 두려운 것이 더 많아졌는데.”
“그런데 왜 만주로 가지 않으셨나요?”
“그건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이제 그 일을 저랑 같이하세요.”
“내가 보기에 같이 하는 것보다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아. 나보다 당신이 한 수 위거든.”
“그걸 이제야 알았단 말이에요?”
“그러게 말이야. 나도 참 멍청하다니까.”
두 사람은 손을 붙들고 골목길의 어둠을 벗어나고 있었다.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셨지만 유성준도 본이도 눈을 찌푸리지 않았다.
이듬해 조선의 독서가를 뒤흔든 베스트셀러가 탄생했다고 신문마다 호들갑을 떨었다. 『사랑의 불꽃』 이래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의 제목은 『살롱의 사랑』이었다. 저자가 무명 씨로 기록된 책은 청춘남녀들의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소문에 의하면 그 책의 인세가 독립운동에 쓰인다고 했다.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은 학생들은 『살롱의 사랑』 두 권 사기 운동까지 벌였다. 하지만 기생들은 두 권이 아니라 몇 권씩 사서 손님들에게 자신들의 무용담이 실린 부분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생들과 몇몇 사람들은 그 책의 내용이 그냥 소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이 젖을 물리며 책을 읽던 시월이는 아이가 젖을 너무 세게 깨물자 아이의 머리를 쳤다. 옆에서 보고 있던 김 군이 아니 이제는 김 씨가 그런 시월이를 나무라며 집을 나섰다. 출근하기 위해 전차를 타면서 김 씨는 생각했다.
험한 세월 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대의를 위해 싸우고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해 싸우기도 한다. 그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쁜 것은 없다. 그 생각을 하자 축 처져 있던 어깨와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전차는 출근하기 위해 가득 들어찬 사람들을 싣고 다음 정거장을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