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에필로그 1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지 간다

by 은예진

평양의 기성 권번 행수기생인 은홍의 방문을 열어젖힌 미령이 냉수부터 청한다. 권번 맞은편에 있는 기생학교에 서화를 가르치기 위해 나가려던 은홍은 미령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도로 주저앉았다. 삼 년 전에 평양을 떠났던 미령은 떠나는 것도 제멋대로 돌아오는 것도 제멋대로다. 은홍은 저런 계집이 흔한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찬물을 두 대접이나 벌컥벌컥 마신 뒤에야 기운이 나는지 주는 김에 담배도 한 대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은홍은 어이없는 얼굴로 혀를 차더니 청자연 한 개비를 뽑아 주었다. 미령은 오랜만에 맛보는 담배 맛이 어찌나 단지 연기가 뼛속까지 스며들도록 깊이 들이마셨다. 그렇게 마셨다가 내뿜어낸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홍이 입을 열었다.


“임 찾아 일본까지 갔던 년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구나. 소식이 없어서 잘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네 행색 하며 다시 찾아온 것을 보니 그동안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을 것은 다 겪은 모양이다.”


은홍은 말을 하면서도 어쩐지 미령의 꼬락서니가 재미있다는 듯 입술이 자꾸만 실룩거린다.


버선은 새까맣게 때가 타 있고 치마저고리는 시골 아낙네들이나 입을법한 물도 들이지 않은 무명옷이다. 거기다 얼굴은 한뎃잠 자는 사람처럼 벌겋게 얼어 있었다. 그야말로 비렁뱅이나 다름없어서 처음에는 어떤 년이 이렇게 함부로 방문을 열어젖히나 싶었다. 평양 기생 중에도 으뜸으로 손꼽히던 기생도 망가지면 저렇게 망가질 수 있구나 싶어 새삼스러웠다.


은홍은 기생학교의 동기들에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기생이 공연히 사랑 타령하며 돌아다녀 보았자 결국 이런 꼴밖에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령은 기생으로서만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막장까지 다녀온 모습이었다.


담배를 한 대 다 피운 미령이 버선을 벗어서 귀퉁이에 집어던지고 빙긋이 웃는다. 땟국이 흐르는 얼굴이 갑작스럽게 달라 보인다.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가 색기를 발하기 시작한다. 얼어서 실핏줄이 보이는 볼은 홍조를 띠는 것 같고 거칠게 터진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든다.


은홍은 순간 뜨끔해서 몸을 뒤로 살짝 뺀다. 미령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 미령은 목적이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대드는데 그런 의욕이 넘칠 때면 눈이 저렇게 푸른빛을 띠었다. 은홍은 이년이 다 잃고 다시 기어들어 와서 행수 자리를 넘보는 것은 아닐까 싶어 겁이 덜컥 났다. 누구도 미령과 붙었다가 본전을 찾은 사람이 없었다.


“형님, 겁내지 마슈. 나 이제 기생질 안 할 거니까.”


은홍은 제 속을 들킨 것만 같아 말을 더듬거렸다.


“이년아, 누, 누가 겁을 낸다고 그러다냐?”

“경성에서 조원구 나리가 와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아내와 아이들을 화마에 잃고 경성에서 죽겠다고 술만 퍼마시던 조원구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평양으로 돌아온 지 꽤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살 마음이 든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술은 마시지 않지만 넋이 나간 몰골로 아내와 아이들 묘에만 다녀서 사람들은 굿을 해야 한다고 수군거렸다.


금슬 좋던 아내와 아이들이 조원구를 데려가려고 작정하고 있으니 굿을 해서 그들을 보내야 한다고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조원구는 도리어 꿈에서조차 가족들이 찾아와 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맞기는 하다만 멀쩡했던 시절에도 제 식구만 챙기고 여자를 밝히지 않던 양반인데 이제 아주 폐인 꼴로 틀어박힌 위인을 어쩌려고? 그 양반 죽으면 그 많은 재산 물려받을 형제들이 아주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는 모양이던데.”


“살려서 내가 데리고 살려고요.”

“뭐? 그 꼴로?”


“왜? 못할까 봐 그러슈? 걱정 마셔. 병신 같은 장가 놈을 만나서 좀 망가지기는 했지만 나 윤미령이요. 기생질도 할 만큼 했고 사내도 겪을 만큼 겪었으니 이제 마누라 자식 챙기는 사내 하나 거느리고 편히 살기로 했는데 그 사내를 내 조원구로 찍었소.”


“그 양반 경성에서 술 퍼마시고 망가져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원체 잘난 척하던 사람이라 기생을 마누라로 들이지는 않을걸.”


“내기라도 하시겠소?”

“뭐?”

“내가 조원구 마누라가 되면 형님은 나한테 뭘 내놓겠소?”

“아니.”

“네?”


“내가 미쳤다고 너랑 내기를 하냐? 윤미령이 기생 주제에 맘 변한 애인 찾아 동경까지 갔던 년인데 그런 년 하고 내가 내기를 하겠니. 싫다. 그냥 조원구랑 잘해봐라.”


윤미령이 파안대소하며 손뼉을 친다. 이제 처음 들어와서 보였던 초췌하고 망가진 아낙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목표를 정하고 의지를 세운 윤미령은 아무리 구질구질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평양 남자들을 치마폭에 넣고 흔들던 요부의 모습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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