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사람들
명주가 피식 웃더니 문밖을 내다보며 소리 질렀다.
“시월아, 왔으면 네 아씨 드시게 주안상 하나 차려내라. 역시 똑똑한 계집은 말귀도 빨리 알아듣는구나. 알았으면 이제 넌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묶어 키운 개는 말이다 풀어놓으면 좋아서 뛰어 나가기는 하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다녀보지 못한 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하지만 풀어놓고 키운 개는 멀리 나갔다가도 제 집을 찾아올 수 있지. 넌 묶어놓고 키웠는데도 눈동냥으로 제 집 찾아오는 법을 익혔던 개다. 알겠니? 그러니 너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본이는 그저 말없이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유성준과 같이 지내는 동안 그가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에 날마다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이제는 손톱을 기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본이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유성준은 총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후일 취조실을 거쳐 고문실로 넘어갔을 때 그는 총을 내려놓은 순간을 가장 후회했다. 알몸인 채로 바늘 상자 앞에 섰을 때 총이 손에 있었다면 고문하던 고무라를 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를 쏘았을 것이다.
“탈취한 무기들은 지금 어디 있나? 의열단 배후에 김석중이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네가 불지 않아도 우리는 곧 김석중을 잡아들일 것이다. 그때쯤 되면 네 뼈가 다 부서져 있을 거야. 어디 한번 버텨봐라.”
고무라는 유성준을 사흘간 잠을 재우지 않고 묻고 또 묻기만 했다. 그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온갖 고문 도구의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관에 집어넣고 물 채우기였다.
알몸의 유성준을 뒤로 손을 묶은 채 관에 쑤셔 넣었다. 밟으면 관 바닥이 더 들어갈 것처럼 고무라는 관에 들어간 유성준의 몸을 마구 밟았다. 그리고 수도꼭지에서 호스를 연결해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물이 등을 적시고 어깨를 채우고 목을 넘어 귀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점점 수위가 올라갈수록 몸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유성준은 관의 바닥이 뚫려서 그 어딘가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는 환각에 빠졌다. 빠지지 않기 위해 몸을 버티려 애를 썼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유성준은 깊고 어두운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머리를 산발한 물귀신이 유성준의 발목을 잡아챘다. 까무룩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어디선가 어머니의 울음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본이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 서 있는 자신이 보이기도 했다. 점점 몸이 편안해지고 이대로 계속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일으켜졌다. 유성준은 질질 끌려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정신을 차릴 겨를 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네가 김석중만 잡게 해 주면 우리는 너를 더는 괴롭히지 않고 재판에 넘겨줄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이런 식으로 가면 넌 제발 죽여 달라고 취조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사정하게 될 거다. 이건 순전히 너의 선택에 달려있어.”
온몸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유성준은 자신이 아는 게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다. 유성준은 의열단과는 협조만 할 뿐이니 아무리 불라고 다그쳐도 불 것이 없었다.
“나는 의열단원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아나키스트다. 나를 가루로 만들어도 나에게서는 알아낼 것이 없을 것이다. 그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 죽은 홍정순은 의열단이고 너는 의열단이 아니라 이거지. 그런데 왜 의열단 하고 움직였나? 너는 네 조직과 움직이면 될 일을?”
“흑기 연맹이 체포된 이후로 조선에서 아나키즘 조직 활동에 어려움을 느껴 개인행동을 계획했다.”
고무라가 질문을 이어가지 않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물기가 마르기 시작하면서 유성준의 온몸이 차갑게 식어갔다. 유성준은 추위에 온몸이 새파랗게 변했다. 이가 덜덜 떨리고 어깨가 저절로 들썩여졌다.
“뭔가 감이 오는데. 작년에 우리 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이 있고 나서 동경에 있는 흑우회에서 공식적으로 아나키스트 단체에서 던진 폭탄이라고 시인했었지. 그렇다면 그 폭탄 네가 던진 거구만. 그때 내가 도망가는 범인을 뒤쫓았었는데 말이야. 이거 앞뒤가 맞는데”
당황한 유성준이 입을 다물자 고무라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거 일타 쌍피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