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진짜 신여성

싸우는 사람들

by 은예진

본이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김석중 선생이 태화관 기생 숙소에 들어가자 본이가 일어서서 그를 맞았다.

“선생님, 그분을 살려 주세요. 그분이 총에 맞지는 않았나요? 그분을 살려주세요.”


본이가 다시 울음을 쏟았다. 김석중 선생은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본이를 품에 안았다.


“자네한테 뭐라고 할 말이 없네. 내가 무능해서 자네와 유군을 지키지 못했어. 미안하구먼. 미안해.”


김석중 선생을 따라 들어온 남자가 뒤에서 고개를 숙였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아주 잠시 죄스런 마음이 드러났다.


“사이토가 의열단에 사람을 심어 놓았듯이 우리도 그들 조직에 사람을 심어 놓았네. 사이토가 저만 잘난 줄 알고 있지만 우리도 만만찮다는 것을 이번에 보여 줄 테니 부디 진정하시게.”


김석중 선생은 이번 기회에 의열단의 기세를 제대로 한 번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이건 단순히 유성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의열단이 사이토 손에서 놀아난 것을 제대로 갚아줄 기회였다.


본이는 대정 권번 행수기생 명주가 데려갔다. 명주는 송장이 다 된 듯 넋을 잃은 본이를 보고 혀를 찼다.


“내가 못산다. 못살아. 계집들이라는 것이 하나같이 사랑 때문에 이 꼴이 되니 내가 누굴 믿겠어. 검은 나비가 이 지경이 되면 어떤 년이 정신을 차릴 수 있겠니. 넌 소향이 년과 다른 줄 알았다. 어서 정신 차리지 못해?”


명주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본이를 다그쳤다. 울고 또 울어 진이 다 빠진 본이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다그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본이는 그 다그침에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유성준이 그 사람 나라를 위해 싸우는 남자다. 너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글을 읽고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 척하더니 다 헛짓이었지? 나는 네가 나처럼 요릿집에서 웃음이나 파는 계집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 목숨 내놓은 남자를 사랑할 만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네가 하는 꼬락서니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구나. 부끄러워서 내가 다 고개를 들 수 없다.”


“형님…….”


“닥쳐라. 네가 나한테 형님이라는 소리를 할 자격이나 있는 줄 아느냐? 살롱에서 서양식 옷만 입고 신여성 입네 하면 신여성인 줄 아니? 넌 겉으로만 잘난 척 대범한 척했어. 아무리 사람들이 이본느라고 불렀어도 너는 한 번도 이본이 아닌 적이 없었던 게지. 꼴도 보기 싫어서 당장 내쫓아 버리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것이 김석중 선생의 부탁 때문이다.”


본이는 마치 죽비로 세차게 등을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소향에게 오라뮨데 백작 부인의 이야기를 전해 줄 때만 해도 자신이 사랑 때문에 이토록 험한 꼴을 보일 줄 몰랐다.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일로 누군가를 설득했던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형님, 제가 정말 사랑 때문에만 이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의 생사가 달린 일이니 이토록 간절한 것 아닙니까?


“웃기지 좀 마라. 네가 정말 그분의 목숨 때문에 울고불고 야단이냐? 내가 보기엔 네 첫정의 남자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러는 것으로 보인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지 절대 그분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어디 한번 잘 생각해 보아라.”


본이는 이제 말을 잇지 못하고 엎드려 어깨를 들썩였다. 지금 흘리는 눈물은 좀 전의 눈물과 다른 것이었다. 본이는 자신이 정말 유성준을 걱정한다면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눈물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아가면서 본이를 보내 준 사람의 마음을 지킬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눈물이었다.


본이는 한참을 그렇게 흐느끼다 일어섰다. 명주는 저것이 무엇을 하려고 일어서는 것인가 의문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본이는 양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조용히 절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절을 마친 본이가 손을 모으고 앉아 입을 열었다.


“형님, 제가 시댁에서 어찌 쫓겨났는지 말씀드렸던가요? 열여섯에 시집와서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사 년 했습니다. 이천의 만석꾼 집안이 시댁이어서 경제적인 걱정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첫날밤 소박을 당한 마음은 항상 허공에 떠 있는 형편이었지요. 동경으로 공부하러 갔던 서방님은 돌아올 때 혼자 오지 않았습니다. 저처럼 시댁 이외에는 나가본 적 없는 여자는 꿈도 꿀 수 없는 신여성을 데리고 왔지요.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화려한 차림에 남자의 사랑을 받는 그녀가 부러웠습니다. 저도 그런 신여성이 되고 싶었지요. 지금까지 어쩌면 그 생각에 얽매여 진짜 신여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날뛰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만 자르고 옷만 양장을 입는다고 신여성이 되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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