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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Sep 04. 2024

48. 스토커

오늘 은하수의 디저트는 베리수플레케이크, 커피는 부담스럽지 않게 중배전한 코스타리카 원두로 결정했다. 영업 시작 전에 우혁이 서아에게 내려 준 커피에서는 꿀에서 나는 달콤한 향과 과일에서 나는 산뜻한 향이 섞여 있었다. 


“단맛과 산미가 같이 느껴지는데요. 뒷맛이 부담 없이 깨끗하고 식은 뒤에 신맛이 날카롭지 않아요.”


우혁이 기분 좋은지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오호라, 네가 날마다 내 커피를 마셔본 보람이 있구나. 내가 이 커피로 내고 싶은 맛을 정확히 아는데. 역시 사람은 가르치고 볼 일이야.”

“내 입이 예민한 거지.”

“내가 잘 내린 거지.”


피디와 작가, 카메라 스텝들은 모두 코를 킁킁거리며 커피 향에 취한 표정을 지었다. 우혁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고 카페 은하수의 문을 열었다. 첫 손님은 양양에서 한 달째 머무르며 서핑을 하고 있는 이십 대 커플이었다. 그들은 어제부터 기다렸다며 사진 찍기에 열을 올렸다.


테이블이 꽉 찼지만 테이크아웃 손님이 계속 줄을 이었다. 핸드드립과 테이크아웃이 별반 어울리지 않지만 은하수의 테이블 수가 너무 적어서 어쩔 수 없었다.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첫 손님이 한 시간을 넘기지 않고 일어섰다. 그들이 나가고 들어온 사람은 혼자 온 남자였다. 그가 카페에 들어오자 시큼한 양파 냄새가 좁은 공간 안에 퍼졌다.


서아가 ‘어서 오세요.’ 인사를 마치고 흠칫했다. 혼자 들어온 남자는 서아를 보더니 입가를 삐뚜름하게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나, 알지?”

“그, 글쎄요?”


서아는 몸이 굳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더듬거렸다. 몰라볼 리가 있나. 고등학교 이 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지금 은하수 안에 맴도는 그 냄새 때문에 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아이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왕따였다.  


이름이 아마 원성태였을 거다. 원성태는 끊임없이 서아의 근처를 맴돌며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나서서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스토킹 수준으로 따라다니기만 했다. 


서아가 감기 때문에 체육 수업에 참가하지 못하고 혼자 교실에 남아 있을 때였다. 엎드려 자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칠판 앞에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남학생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에이 잊어버렸을 리 없는데 나, 고등학교 동창 원성태! 방송 보고 엄청 반가웠는데.”


하굣길에서도 고개를 돌려보면 원성태가 있었다. 틀림없이 주변을 맴도는데 표시를 내지 않아서 그녀가 항의

하기도 어려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가끔 길에서 원성태를 볼 때면 흠칫 놀라고는 했다. 


“기억나네. 원성태. 그럼 커피 즐겁게 마시고 가.”


서아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주방으로 피했다. 원성태는 커피를 마시고 수플레 케이크를 먹는 동안 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게 너무 과해 촬영 스텝들조차 눈치를 채고 수근거릴 지경이었다. 은하수를 방문한 사람들이 단순히 커피만 마시러 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서아와 우혁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이해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원성태는 누구라도 불쾌해질 만큼 집요한 시선으로 서아를 쫓았다.


원성태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자 우혁이 드립포트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서아를 잡아끌었다. 주방 안쪽에서 집으로 연결된 공간에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았다. 우혁은 손으로 카메라가 따라오지 못하게 손짓한 뒤 서아에게 물었다.


“저 자식 뭐야? 뭔데 너를 저렇게 재수 없는 눈으로 보고 있어?”


서아가 잠시 쉬고 있는 스텝들을 흘깃 보더니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데 그때도 저렇게 맨날 보고 있어서 굉장히 무서웠어요. 그렇다고 뭐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닌데 가끔 혼자 있을 때 쟤랑 마주치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웠어요.”


우혁이 허리에 손을 얹고 씩씩대며 원성태를 쏘아보았다. 원성태는 우혁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니까 아무 짓도 안 하고 저렇게 따라다니며 보기만 한다고?”


서아가 울상이 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가끔 길에서 보여서 무서웠는데 요 몇 년은 못 봤어요. 갑자기 여기서 이렇게 나타나니 나도 너무 당황스러워요.”


“군대 갔다 왔겠지. 그러다 방송에서 널 보니까 다시 옛날 생각이 난 모양인데. 저걸 어떻게 처리하지. 아, 골치 아픈데. 저런 자식들이 언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 앞으로 조심해야겠는데.”


우혁의 걱정에 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꽤 오랫동안 저렇게 따라다니며 보기만 했는데 아무 짓도 안 했던 사람이 갑자기 그럴 수 있을까요?”

“끝까지 그렇게 보기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이 이야기를 마치고 고개를 돌렸을 때 원성태가 보이지 않았다. 우혁이 나가보자 구 작가가 손가락으로 그가 나갔음을 알려주었다. 


“휴우.”


서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너 생각보다 많이 신경 쓰였구나?”

“누가 나를 계속 저런 눈을 보고 있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우혁은 밖을 내다보며 혹시라도 원성태가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 계속 신경을 썼다. 영업이 끝나자 제작진이 저녁은 양양의 특산물인 송이버섯전골을 먹으러 가야 한다고 했다. 식당에 도착하자 미리 가 있던 스텝들이 촬영 준비를 마쳐놓고 있었다. 식당의 본관에서는 기존 영업을 하고 별관을 비워 두 사람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았다.


식당 사장은 송이버섯이 듬뿍 들어간 전골을 내놓으며 송이버섯의 효과에 대해 청산유수로 설명했다. 서아가 잠깐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서자 사장이 직접 안내를 하겠다며 앞장섰다.


“촬영을 앞두고 갑자기 별관 화장실이 고장 나서 본관으로 가셔야 합니다.”


사장을 따라가던 서아는 촬영 때문에 모여 있는 사람들 틈에서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쓴 원성태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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