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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Sep 06. 2024

49. 이러는 거 싫어요

화장실을 다녀와 허겁지겁 별관으로 들어온 서아는 잠시 눈치를 살폈다. 이번 송이버섯 식당 촬영은 지자체 협찬이기 때문에 뺄 수 없는 코스라고 했다. 공연히 여기서 원성태 이야기를 우혁에게 했다가는 촬영에 차질이 빚어질 것만 같아 입을 다물었다.


서아가 너무 굳어 있는 바람에 촬영 중간에 피디가 들어와 조금만 더 리액션을 부탁드린다는 말까지 했다. 서아는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마음같이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겨우 밥을 먹고 나자 속이 거북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우혁이 더는 안 되겠는지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자며 피디에게 부탁했다. 서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본 피디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석은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가고 우혁의 개인 스텝들은 갑자기 생긴 여유에 신이 나서 재빨리 달아나 버렸다. 사람들이 서둘러 떠나는 것을 확인한 서아가 우혁의 팔을 잡고 소곤거렸다.


“아까 화장실 갔을 때 본관에 있는 원성태를 봤어요.”


우혁이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둑해진 주차장에는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자리를 뜨는 제작진 몇 명만 보일 뿐이었다. 


“우선 집에 가서 피디하고 상의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그 자식이 얼쩡거리면 더는 여기서 촬영할 수 없다고 확실하게 통보해야 할 것 같아.”


차 문을 열고 서아를 태우려던 우혁이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서아는 무슨 일인가 싶어 우혁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럽쇼. 이게 뭐야?”

“왜요? 무슨 일이에요?”

“누가 바퀴에 못을 박아 놨는데.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네 바퀴 전부 다.”


그제야 서아 눈에도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우혁은 차에 올라타 블랙박스 화면을 확인하고 서아에게 내밀었다.


“얘, 원성태 맞지?”


서아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드릴로 자동차 바퀴에 나사못을 박고 있는 원성태의 모습을 확인했다.


“맞아요.”

“이 자식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화가 난 우혁이 주먹을 불끈 쥐고 핸들을 후려쳤다. 그 사이에 제작팀들은 모두 철수했고 주차장이 조용해졌다. 서아는 모든 게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 위축된 눈빛으로 우혁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은 내가 너랑 같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고등학교 때 네가 저 자식 때문에 얼마나 신경이 쓰였을까 생각하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네.”

“네?”


서아는 우혁이 자동차 때문에 화를 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우혁은 자동차가 아니라 어린 시절에 원성태 때문에 두려웠을 서아 때문에 화를 내는 거였다.


“뭘 그렇게 놀래?”

“아니, 나는 오빠가 펑크 난 차 때문에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차? 이깟 차가 뭐라고 내가 차 때문에 화를 내니?”


우혁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은서아! 잘 들어둬.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러니까 차나 집이나 촬영 따위 보다 먼저 인건 너야! 네가 일 순위라는 사실 잊지 말고 그에 걸맞게 행동해.”


서아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깍지 낀 팔을 앞으로 쭉 내밀며 허리를 늘였다.


“딴짓하지 말고 대답해.”


서아가 앞으로 내민 양팔을 내리지 못하고 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알았다고 하면 돼.”

“알았어요.”


서아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팔을 계속 뻗고 있었다. 그런 서아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우혁이 그녀의 팔을 잡고 내려놓았다.


“뭐 하는 거냐?”

“쑥스러워하는 거예요.”


우혁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서아의 어깨를 껴안았다. 서아는 화들짝 놀라 팔꿈치로 우혁의 손을 쳐냈다.


“뭐야? 새삼스럽게 왜 이래?”

“카메라가 없잖아요!”

“우리 사이가 카메라 없다고 이렇게 정색할 일이냐?”

“당연하지요. 우리 진짜 연인 아니에요. 잊어버렸나 봐!”

“쉿!”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여기 카메라가 있는데 이게 혹시 안 꺼졌으면 어쩌려고.”


우혁이 차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를 툭툭 치며 말했다. 서아는 당황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두리번거렸다.


“지금은 꺼져 있는 거 확실히 맞아.”


서아가 눈을 흘기며 우혁의 팔을 쳤다. 우혁은 그런 서아의 팔목을 잡고 코가 닿을 것 같이 가깝게 얼굴을 댔다.


“은서아.”


그때 갑자기 주차장의 불이 모두 꺼졌다. 영업이 끝난 송이버섯 식당에서 직원들이 나와 승합차에 올라탔다. 승합차의 불빛이 그들의 차를 비추자 서아와 얼굴을 마주 대고 있던 우혁이 그녀를 안은 채 몸을 숙였다.


우혁의 숨결이 서아의 얼굴에 닿자 두 사람 모두 얼굴이 화끈거렸다. 차장 안으로 들어온 불빛이 우혁의 머리를 맴돌다 나갔다. 우혁이 몸을 일으키며 민망한지 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 마요.”

“뭘?”

"이렇게 머리 만지는 거 싫어요.”

“왜?”

“오빠가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아빠처럼 굴잖아요.”

“그럼 안 되나?”

“당연히 안 되지요. 그럴 때마다 날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서 싫어요.”

“나한테 너는 어린애 맞는데.”


서아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우혁이 흩트려 놓은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우리가 지금 다정한 연인 노릇을 하면서 촬영 중인데 어린애라고요? 흥,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하던데요.”


두 사람은 보험회사에 연락해 식당 주차장을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티격태격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집에 가면 사방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니 잠시 이렇게 숨을 돌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서아 너, 나한테 지금 여자로 봐달라는 거야?”

“그, 그런 건 아닌데…….”


서아가 말을 얼버무리며 몸을 돌렸다. 그때 어둠 컴컴한 주차장 안쪽에 뭔가 웅크리고 있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강아지 인가 싶어 허리를 굽히고 차창 밖을 주시하던 서아가 놀라서 흡 소리를 냈다.


서아의 시선이 가닿은 곳으로 고개를 돌린 우혁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저거 사람 맞지?”

“원성태 같은데요.”

“저 변태 자식이 지금 저기 앉아서 우리를 보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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