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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Sep 02. 2024

47. 은하수

카페 이름은 은하수가 되었다. 뭔가 촌스럽지만 그래서 레트로한 분위기가 난다는 우혁의 주장에 서아가 수긍해 주었다. 처음에는 강우혁을 떠올리는 江으로 하겠다고 했다가 은서아의 은을 떠올릴 silver로 하겠다는 것을 간신히 말려놓은 터였다.


바닷가에서 강이라는 간판을 다는 것도 서아의 성을 따서 실버라고 하는 것도 우스꽝스러우니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은하수가 나을 것 같았다. 우혁은 은하수는 은하를 강에 비유하여 쓰는 말이니 ‘은’도 있고 ‘강’도 있는 이름이라며 나름 흡족해했다.  


우혁이 카페 이름을 은하수로 짓자 제작진은 인테리어를 조금 더 레트로한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우혁이 간판을 직접 페인팅하겠다고 했을 때 서아는 믿지 않았다. 우혁이 그런 재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막상 그가 붓질을 시작하자 깜짝 놀랄 만큼 진지해 보였다.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검은색을 간판 가득 빽빽하게 칠했다. 페인트 깡통을 든 우혁이 붓에 흰색을 듬뿍 묻히더니 검은 하늘 같은 간판에 과감하게 뿌렸다. 그의 붓이 움직이는 곳에 별 무리가 만들어졌다. 그는 물감 색을 바꿔가며 뿌렸고 간판에는 아름다운 은하수가 만들어졌다. 


서아는 물감 심부름을 하면서도 처음 보는 우혁의 심취한 모습에 낯선 느낌이 들었다.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고 자신이 몰랐던 우혁의 모습이 아직 더 많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 무리 위에 노란색 페인트로 은하수를 멋들어지게 쓴 우혁이 싱긋 웃으며 서아를 바라보았다.


“오빠, 전에 그림 그렸어요?”


서아의 목소리에 찬탄이 묻어났다.


“잠깐.”

“그런데 왜 지금은 안 그려요?”

“사람들이 하정우 흉내 낸다고 할 것 같아서.”


우혁이 손으로 마이크를 막고 서아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제작진은 우혁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궁금해서 안달했다. 서아는 입을 막고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

“사실은 내가 좋아서 그리던 그림이 어느 순간 배우 강우혁이 그리는 그림으로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요즘은 안 그리고 있어. 그리고 싶은 날이 오면 그때 그리려고.”

“혹시 사무실 입구에 있는 오빠 얼굴 그림도?”

“응, 내가 그렸어. 앤디 워홀 흉내에 불과하지만.”

“멋있던데.”


우혁이 싱긋 웃으며 페인트 통을 내려놓았다. 


“양양에서 그림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그림은 혼자 그리는 거잖아. 나는 여기서 혼자 하는 거 싫어. 뭐든 너랑 같이 하는 거만 할 거야.”

“오빠가 그림 그리는 동안 나는 케이크를 굽고 청소도 하면 되지요.”

“아니, 케이크도 같이 만들고, 청소도 같이 해야지.”

“그런가?”


서아가 자연스럽게 우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혁이 서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품으로 바싹 당겼다. 서아의 얼굴이 우혁의 가슴에 파묻히다시피 했다. 


지난번 촬영보다 한층 더 스킨십이 늘어났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이 서로 상의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진행일 뿐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혁과 서아조차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스킨십이다.


지난번 촬영에는 더운 바람이 불어오던 바닷가에서 오늘은 선선한 바람이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우혁은 바람을 막듯 팔을 둘러 서아를 껴안고 있었다.


은하수의 메뉴는 우혁이 핸드 드립 하는 커피와 자몽 수제청 그리고 서아가 만드는 쿠키와 케이크 몇 가지가 전부였다. 영업시간은 오후 1시에서 6시까지 이번 촬영은 삼일 간 진행하기로 했다. 구 작가는 최대한 손님을 적게 받고 두 사람이 바닷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찍을 거라고 했다.


촬영 당일 구 작가는 자기가 했던 말을 전혀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깨닫고 당혹스러웠다.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카페 앞에는 두 사람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시청률 대박과 함께 관심이 폭발해서 간판도 달리지 않은 양양 카페 사진이 SNS에 도배되었다. 피디와 구 작가는 영업시간을 늘리지는 않겠지만 영업하는 동안 오는 손님들은 최대한 대접해야 한다는 쪽으로 노선을 바꿨다. 


리넨 에이프런을 두른 우혁과 서아는 서로 마주 보고 결전에 나서는 용사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알라메종에서 하루 종일 일해봤으니까 별문제 없는데 오빠는 괜찮을까?”


서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우혁이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이두박근이 불거진 팔을 보여주었다. 


“이만하면 커피 백 잔은 너끈히 내리게 생기지 않았냐?”

“진짜 못 말린다.”


서아가 웃으면서 우혁이 잡아 올린 소매를 끌어내렸다. 소매를 내리는 서아의 손끝이 우혁의 팔을 쓸어내렸다.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는 콘셉트로 촬영하는 동안 스킨십은 연기와 똑같다고 생각하며 이루어진다.   


두 사람 모두 그렇게 생각하려 애를 쓰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어 종종 혼란스럽다. 어떤 때는 그걸 용케도 감추고 또 어떤 때는 감추지 못해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시청자들은 그 묘한 분위기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도리어 환호한다. 거기서 서툴게 설레는 그들의 감정을 읽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다.


서아는 우혁의 팔을 쓸어내린 손을 내리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아직도 손끝에 스친 그 느낌에 머리카락이 서는 것만 같았다. 자기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혈액을 타고 모세혈관 끝까지 달려가 열기에 휩싸이게 만든다. 


“흐음.”


서아는 숨을 몰아쉬고 우혁을 슬쩍 바라보았다. 오빠는 나보다 십 년을 더 살았고 많은 경험이 있으니 이런 뜨거운 감정이 뭔지 알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뭔가 안달이 나는 이 감정에 이름이 뭔지 알고 싶기도 하고 절대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알고 나면 머릿속이 더 복잡해질 것 만 같아 숨을 삼켰다. 


가쁘게 뛰던 심장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우혁의 손을 잡아도 될 것 같았다. 서아의 시간과 구경꾼들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갔다. 객관적으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혼란에 빠져 숨을 몰아쉬던 서아에게는 길고 긴 시간이었다.


“가자 오빠!”


서아가 가볍게 손을 내밀자 우혁이 웃으며 잡았다. 우혁은 뭔가 아는 것처럼 아니 그녀가 혼란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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