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키가 10센티미터나 작고 나만큼 평범하게 생긴 딸은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그건 바로 '연애'다. 이 연애박사는 자기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절대 고백을 하지 않고 고백을 받아내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딸은 공부를 잘했는데 핵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내는 요령이 좋았고 눈치가 빨랐다. 제법 어려운 자격증 시험을 대학교 삼 학년 때 최연소로 합격했는데 공부 기간을 단축시킨 것은 전체를 공부하지 않고 핵심을 잘 뽑아서 요령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공부하듯 연애도 한 것이다. 언제 시선을 줘야 하고 언제 시선을 거두어야 할지 정확하게 파악해서 치고 빠져 마음에 드는 남자의 고백을 받아냈고 그 남자와 사귀어보니 아니다 싶으면 바로 정리했다. 정리도 빠르고 정확했다.
나는 그런 딸이 결혼을 좀 일찍 할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취업하고 연수기간 동안 친해진 동기들과 같은 지역으로 발령받으면서 딸은 새 연애를 시작했다. 그동안 공부하고 취업준비하느라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던 남자 친구는 로망을 이루었다고 뿌듯해했다. 취업하면 못해본 연애를 하겠다고 두 주먹 불끈 쥐었었는데 그걸 이루게 된 것이다.
신입사원의 애환을 함께 나누며 아기자기한 연애를 시작한 이 젊은 연인들에게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회사의 본사가 경상남도 끝자락에 있는데 본사 결원에 필요한 인원을 충당해야 한다며 이제 발령받은 지 삼 개월밖에 되지 않은 딸이 착출 되어버린 것이다.
시작하자마자 장거리 커플이 된 남자친구는 그때부터 일 년간 담당자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어필을 하며 자신을 본사로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남자친구의 커리어에는 본사보다 지역본부를 도는 것이 낫다는 주변의 충고가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 순진하고 우직한 연애초보는 요즘 청년답지 않게 사랑하는 여자랑 빨리 결혼이 하고 싶었다. 결혼하면 고생이라는 사람들 말 따위 신경 쓰지 않았고 이제 막 취업했는데 그동안 즐기지 못한 삶을 좀 누리라는 엄마의 충고도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본사로 내려가게 된 남자친구와 딸은 이렇게 된 거 회사에서 주는 숙소에서 눈치를 보느니 방을 얻어버리자며 조그만 투룸을 구해 살림을 시작했다. 여기서 한마디 하자면 나는 이걸 사위의 추진력이라고 보고 사돈은 우리 딸의 추진력이라고 본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게 뭐 중요할까. 하여튼 이 커플은 생전 와본 적 없는 남쪽나라에서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사랑했고 결혼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시켰다.
모아놓은 돈도 없는 이제 갓 취업한 신입사원이 그것도 스물여덟 살 밖에 되지 않은 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을 했다. 그것도 부모에게 한 푼도 신세 지지 않고 말이다. 투룸은 월세였고 결혼비용 정도는 계획하면서 모아갔고 코로나 시즌이라 신혼여행은 강원도로 갔다.
나는 집에서 네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에서 혼자 있어야 하는 딸 곁에 보기만 해도 든든한 청년이 있어 주어서 무척 기뻤다. 어차피 딸은 고등학교를 기숙학교로 가면서 내 품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딸이 서른 전에 결혼할 것이라는 짐작을 이미 오래전에 하고 있었기에 당연한 결과로 생각했다.
하지만 갓 사회에 첫발을 디딘 서른도 되지 않은 아들이, 돈을 벌어 엄마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게 되자마자 며느리의 남편이 되겠다 서두르니 사돈은 몹시 섭섭했다고 한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나 같은 마음일 수 없으니 말이다.
2021년 9월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했고 나는 사위를 얻었다. 딸은 결혼날짜마저 기가 막히게 잡아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인사를 드리는 것과 추석 방문을 한꺼번에 할 수 있게 잡았다. 친구들이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길일을 잡았다고 칭찬했다. 본인은 의도한게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봐도 길일은 길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