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 19가 한창이던 기간 동안 마스크를 쓰고 방역수칙을 지킨 덕분에 코로나뿐만 아니라 다른 전염병도 예방이 되어 우리는 감기조차 쉽게 걸리지 않았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으면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그 기간 동안 면역에 공백이 생기는 바람에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세간에는 폐렴이나 백일해 같은 전염성 질환에 걸린 환자들이 훨씬 많다고 한다.
경남 지방에는 백일해가 더욱 심해서 아기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방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아기 엄마와 아빠는 미리 맞고 신생아를 보고 싶은 양쪽 집안 가족들은 아기가 태어난 후 예방 주사를 맞았다. 병원과 조리원에 있는 동안은 만날 수 없으니 그 사이 주사를 맞고 항체가 생기기를 기다리면 되었다.
아기를 보러 떠나는 날 고속도로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비가 쏟아졌다. 무주와 덕유산을 지나는 하늘은 컴컴했고 오전에 출발한 우리는 대전에서 있던 사위 누나의 결혼식을 보고 저녁때가 돼서야 경남에 도착했다. 딸이 사는 곳은 정말이지 멀어도 너무 멀고 가는 길은 험난했다.
출구 찾기도 어려운 주상복합 아파트의 주차장을 거쳐 딸의 집 문을 열었을 때 훅하고 들어오는 아기 냄새가 나를 반겼다. 내가 삼십 년 전에 아기를 키우고 잊어버렸던 그 젖냄새 말이다. 부랴부랴 손을 씻고 아기 침대에 잠들어 있는 손녀를 본 순간 남편과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근접 사진으로 본 아기와 실제로 본 아기는 너무 차이가 많이 났다. 세상에 아기가 팔뚝만 하다니. 작아도 너무 작은 아기가 속싸개 옷인 스와들업을 입고 잠들어 있었다. 사위가 누나 결혼식 때문에 전날 밤에 대전에 가고 처음으로 혼자 아기를 본 딸은 지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여섯 시간 동안 안고 서 있었는데 정작 안아줄 사람이 왔더니 자네."
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투덜댔다. 장비 덕을 보겠다고 비싼 수유 의자를 샀더니 아기가 장비를 싫어한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조리원을 나오자마자 딸의 인스타에는 집에 왔는데 집에 가고 싶다는 글귀와 울고 있는 아기 사진이 올라왔더랬다.
노란 병아리색 스와들업을 입은 아기는 언제 울었냐는 듯 새근새근 잘도 잤다. 우리가 얼굴을 들이밀고 아기를 봐도, 반갑다며 호들갑을 떨어도 여전히 잘도 잔다. 아기 엄마의 하소연이 무색하게 말이다.
안고 흔들면 잠잠하다 내려놓으면 우는 아기를 보니 아직 엄마 뱃속에서 나와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세상 밖으로 나와 혼란스러운 환경의 변화를 겪어야 하는 아기 입장에서 얼마나 힘들지 우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이른 아침, 밤새 아기를 안고 거실을 돌았다는 아기 아빠에게서 넘겨받아 품에 안고 있으려니 감개가 무량했다. 아직 손자를 품에 안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갑자기 자기가 이렇게 늙었나 싶은 마음이 들 것 같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즉시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크게 내 저었다. 아기를 품에 안는 순간 느껴지는 첫 번째 감정은 '살고 싶다'는 것이다.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를 보고 우리 땡땡이 학교 들어갈 때까지, 우리 땡땡이 대학 가는 거 보고, 결혼하는 거 보고 죽어야 할 텐데 라는 말을 왜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기를 보는 순간 당황스러울 정도로 살고 싶었다.
이렇게 삶의 질이 바닥인 비루한 육신을 가지고 사느니 빨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노래하는 내가 아기를 안자 살고 싶었다. 아기의 미래를 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그냥 그 작은 생명체를 품에 안는 순간, 살아서 이 아이를 사랑하고 싶었다.
자식을 낳아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부모의 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가는 것처럼 손자를 안아보지 않은 사람은 또 절대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자식들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이 속상해하는 것을 보고 뭘 또 그렇게 섭섭해하나 싶었다. 그 또한 이유가 있어서 한 결정인데 받아들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이 조그만 아이를 품에 안자 속상해하던 사람들이 이해되었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소유보다 경험에 가치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다닌다. 경험으로 치자면 여행 따위가 비교될 수 없는 일이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할머니가 되는 것은 그 어떤 여행보다 가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삶의 행로이다. 나는 아기를 어르며 대학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둥 딸이 영어 공부를 좀 해서 아이 초등학교 다닐 때 외국으로 연수를 가라는 둥 아직 먼 이야기를 한다. 그야말로 할머니스러운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갓난아기 데리고 그게 무슨 말이냐며 다들 나를 비웃는다. 나는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머니 노릇을 한다.
안고 있던 아기를 내려놓자 새근거리며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기와의 짧은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나고 나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종교가 없어도 우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할 수 있다. 정화수를 떠놓지 않아도 초를 켜지 않아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기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한다. 우리 아기가 무탈하게 자랄 수 있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