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혁의 품에서 서아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얼굴도 알지 못하는 엄마가 생각났다. 좀처럼 엄마 생각을 하는 일이 없었다. 엄마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서아는 엄마가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이상하게 엄마가 떠올랐다.
뭔지 모를 감정을 털어내느라 우혁에게 더 바싹 붙었다. 우혁은 그런 서아를 와락 껴안고 팔에 힘을 주었다. 그제야 서아는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감정이 잦아드는 걸 느꼈다. 이런 마음이 사랑이구나 싶었다.
두 사람은 애초에 하나였던 것처럼 서로를 껴안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직 날이 밝지 않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어디선가 우혁의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귓가에 맴돌던 벨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서아가 고개를 들자 우혁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더 자. 내가 내려가 볼게. 핸드폰이 거실에 있어.”
우혁이 어둠 속에서 의자에 걸쳐있는 목욕 가운을 입고 문을 열었다. 우혁은 더 자라고 했지만 잠은 이미 달아난 뒤였다. 무언가 께름칙한 기분에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 주섬주섬 바닥에 흩어져 있는 옷을 찾아 입었다.
거실을 내려가자 우혁이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뭐야?”
서아가 우혁의 옆에 앉으며 그의 어깨에 턱을 걸쳤다. 우혁이 보고 있는 동영상 속에서는 연예인을 비롯해 유명인 사생활을 파헤치기로 유명한 크리에이터 김배우가 떠들고 있었다. 김배우는 강우혁과 은서아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이 가짜 열애를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차현준이 말한 선물이 이거야?”
서아는 재빨리 그녀의 핸드폰을 찾아 포털 창을 열었다. 예상대로 검색어 일 위가 강우혁, 이 위가 은서아, 삼 위가 은강 커플이었다.
“민 기자가 터트린 모양이야.”
“응? 누구라고? 민 기자?”
서아는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민 기자라니. 자기가 제안하고 독점 열애설로 최고의 혜택을 누린 민 기자라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뭔가 착오가 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민 기자가 그럴 수가 있어.”
“그게 바로 이 바닥의 민낯이야. 앞으로 너도 유념해 둬야 해. 누구도 믿지 말 것. 하물며 나도 믿지 말 것!”
우혁이 새빨개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고 있지만 그도 충격이 큰 게 틀림없었다. 서아는 우혁의 허리를 붙들고 다급하게 외쳤다.
“싫어. 나는 오빠를 믿을 거야.”
우혁은 말을 잇지 못하고 서아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곧이어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구 작가가 다급한 목소리로 우혁 오빠를 외쳤다.
-오빠, 아니지. 절대 아니지. 김배우 쟤가 조회 수 올리려고 없는 말 지어낸 거지?
“그럼. 당연하지. 내가 서아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걱정하지 마. 우리가 확실하게 해결해 줄 테니까.”
-어떻게?
“기다려 봐. 결정되면 제일 먼저 너한테 알려줄게.”
-나, 오빠만 믿는다. 진짜 오빠 믿는다.
구 작가는 믿는다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서아의 귀에까지 믿는다는 소리만 들렸다.
“나를 믿지 않으니까 이렇게 믿는다는 소리를 반복하지. 진짜 믿으면 이런 소리 안 해. 구작은 지금쯤 플랜 비에 플랜 씨까지 마련하느라 난리일걸.”
우혁이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해결 방법이 있는 거야?”
서아의 질문에 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기다려 봐. 민석이가 들어와서 말해 줄 거야.”
서아는 민석을 기다리며 김배우의 은강 커플 가짜 열애설 동영상에 달린 댓글을 읽었다. 댓글에는 내 그럴 줄 알았다 처음부터 주작의 냄새가 솔솔 났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강우혁의 팬들은 믿을 수 없다며 옹호해 주려 노력했지만 열애 기사를 쓴 팩트 뉴스 민 기자의 증언은 너무 신빙성 있어 보였다.
서아가 계속해서 댓글을 읽고 있자 보다 못한 우혁이 핸드폰을 뺏어버렸다.
“그만 봐. 계속 봐봤자 머리만 아파.”
우혁에게 핸드폰을 빼앗긴 서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그래, 그만 봐야지. 이럴 때는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서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싱크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우혁이 따라 들어와 벽에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뭘 하려고?”
“우리한테는 지금 달달한 게 필요해. 기다려, 케이크 만들어 줄게.”
서아가 싱크대를 열어 케이크 재료를 이것저것 늘어놓으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시간에?”
우혁이 턱으로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서아는 시계를 흘끔 보더니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지금 다시 침대에 들어간다고 잠이 올 것도 아니잖아.”
서아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계란을 깨트려 흰자를 분리했다. 머랭을 치기 위해 거품기를 돌리자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우혁은 서아의 손에서 거품기를 빼앗아 옆으로 밀어 두고 그녀를 잡아끌었다.
서아의 머리가 우혁의 가슴에 닿자 대충 여며놓은 가운의 앞섶이 벌어졌다. 주방의 환한 led 불빛 아래 우혁의 가운이 벌어져 몸이 드러나자 서아가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섰다. 서아는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몰라, 빨리 가려.”
우혁이 싱글싱글 웃으며 서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우리가 방금 위층 내 방에 같이 있었는데 이런 걸 가지고 부끄러워한단 말이야.”
“방에서는 어두워서 잘 안 보였잖아. 그리고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단 말이야.”
“그럼 이번에는 환한 데서 보여줘야겠네.”
서아는 뒤로 돌아서서 소리를 지르며 빨리 입으라고 성화를 댔지만 우혁은 뒤에서 서아를 끌어안았다. 서아의 맨투맨 티셔츠와 레깅스 위로 우혁의 몸이 닿는 느낌이 났다.
서아가 손을 내려 그녀를 안고 있는 우혁의 팔을 더듬었다. 팔을 타고 올라가자 가운이 손에 만져졌다.
“휴, 가운을 벗지는 않았구나.”
“뭐? 그걸 기대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우혁이 웃으며 몸을 움직이려는 걸 서아가 붙들었다.
“그냥 오빠가 이렇게 나를 안고 있어 줬으면 좋겠어.”
서아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은 우혁이 가만히 서서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서아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우혁의 손을 꽉 쥔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날이 밝아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우혁의 아늑한 품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