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국 사가지고 들어가는 중이니 아침 준비하지 말라며 민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직원들이랑 같이 해장국 먹으러 가다 두 사람 생각이 나서 포장해 왔어요.”
민석이 포장 용기를 꺼내 뚜껑을 열자 황태 해장국과 내장탕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구수한 황태 해장국 냄새를 맡자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와 맛있겠다.”
서아가 침을 꼴깍 삼키며 민석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민석은 그런 서아의 웃음이 안쓰러워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아는 분위기를 가라앉히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밥까지 다 포장해 왔으니 먹기만 하면 돼요.”
“역시 저 생각해주는 사람은 장 대표님 밖에 없네요. 제가 이 집 가사도우미 아니겠습니까. 괴로워도 슬퍼도
밥은 해야 하는데 덕분에 쉽니다.”
“야! 누가 너보고 밥 하라 했니? 듣는 이 집 주인 억울하다.”
우혁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왔다. 우혁은 민석의 어깨를 툭 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고생했다. 차현준이 걔가 민 기자를 족친 모양이다.”
“응, 아무리 그래도 지가 사람이면 미리 우리한테 언질이라도 줬어야지.”
“이 바닥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우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싱긋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소속사 입장 반박문 언론사에 다 돌렸어. 당시 민 기자한테 두 사람 사진을 찍게 한 건 맞지만 열애 중이었던 건 사실이다. 민 기자가 정확히 알지 못해서 오해가 생긴 거다. 이런 요지의 반박문이야.”
“사람들이 믿어 줄까요?”
서아가 황태 해장국에 밥을 말면서 물었다. 내장탕을 먹던 우혁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 소주를 꺼내왔다.
“원래 어제 술을 마시고 오늘 해장국을 먹어야 하지만 어제 술을 못 마셨으니 그냥 반주로 마셔야겠다.”
“아침부터?”
“오늘 같은 날은 아침이라도 한잔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우혁의 말에 서아가 앞에 있던 물을 마시고 물 컵을 내밀었다.
“좋아 나도 한 잔.”
우혁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아가 정말 마시겠다고 하자 흠칫했다.
“한 잔 만.”
“오케이.”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민석은 거절하고 서아와 우혁은 그렇게 한 잔만으로 시작한 소주를 한 병 모두 비웠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서아의 얼굴이 홍옥처럼 빨갛게 상기되었다. 우혁은 그런 서아의 뺨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까 우혁 오빠가 해결 방법이 있다고 했는데 아직 그건 말 안 한 거 같은데요.”
서아가 마지막 남은 소주 한 모금을 털어 넣고 민석을 향해 물었다. 민석은 잠시 망설이며 우혁을 바라보았다. 우혁은 그런 민석의 눈을 응시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서아는 갑자기 몸을 휙 돌려 고개를 흔들고 있는 우혁의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뭔데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야? 왜 나만 몰라? 빨리 말해줘 봐. 뭔데?”
알딸딸하게 취한 서아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우혁의 옷깃을 잡고 늘어졌다.
“난 아직 너한테 말할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았어.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은 일이니까 가만히 있어라.”
우혁이 서아의 손을 떼어놓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서아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우혁에게 보챘다.
“가르쳐 주지 않으면 절대 안 떨어질 거야. 뭔데? 뭔데 이렇게 두 사람 다 난감한 얼굴이야?”
“들으면 후회할 거야. 그러니까 듣지 마.”
시간이 흐를수록 얼굴은 더 빨개지고 취기도 오른 서아가 이번에는 민석을 향해 조르기 시작했다.
“민석 씨, 아니 민석 오빠, 뭔데 그래요. 뭔데 도대체 뭔데?”
민석을 처음 만날 당시만 해도 장 대표님과 민석 씨를 혼용해 부르던 서아는 최근 들어 깍듯하게 장 대표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너무 친해지면 예의를 지키지 못하게 될까 봐 일부러 거리를 두는 듯 보였던 서아가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민석 오빠를 부르자 민석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은서아, 너 뭐 하냐?”
민석을 향해 몸을 기울인 서아를 보다 못한 우혁이 그녀를 잡아당기며 말렸다. 서아는 우혁의 허리를 잡고 나만 왕따 시킨다고 투덜댔다. 입을 내밀고 있는 서아를 빤히 바라보던 우혁이 갑자기 그녀를 데리고 거실로 나갔다.
“너, 정말 듣고 싶어? 듣고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내 일이기도 한데 나도 들어야지! 아직도 여전히 내 이름이 검색어 이등이잖아.”
“알았어. 말할게.”
서아가 침을 꼴깍 삼키며 허리를 곧추세우고 우혁을 바라보았다. 우혁은 망설이듯 손가락을 깍지 꼈다 다시 풀기를 반복했다. 주방에서는 민석이 상을 치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서아가 나서서 치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지금은 주방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직원들은 우리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대.”
“뭐라고?”
당황한 서아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우리가 결혼 발표를 해서 의심하는 사람들 입을 막아버리래.”
서아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서아가 자리에서 일어서 욕실로 들어갔다.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결혼이라고? 우혁 오빠랑 결혼을 하라고? 우혁을 사랑하지만 그와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아가 하고 싶은 건 르 꼬르동 블루로 제과를 배우러 가는 거지 결혼이 아니었다.
거울을 보고 결혼이라는 말을 반복하던 서아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세수만으로는 부족해서 세면대에 물을 받
아놓고 얼굴이 잠기게 들어갔다.
“푸우.”
참고 있던 숨을 뱉어내며 헉헉거렸다. 그렇게 몇 차례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우혁과 민석이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은 옷을 닦으며 서아가 민석을 불렀다.
“장 대표님 잠깐 따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요.”
“나 운동할게 두 사람이 이야기해.”
우혁은 서아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건조하게 말했다. 그런 우혁의 모습이 낯설어 서아는 울컥했다. 지난밤 그녀의 귀에 대고 다정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이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우혁과 이 집 전체가 낯설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