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혁이 운동실로 들어가고 서아는 민석의 맞은편에 앉아 커피에 손을 뻗었다. 컵은 따끈했지만 적당히 식어서 마시기에 좋은 온도의 커피였다.
“커피가 적당히 식었네요.”
“뭐든지 그렇게 때가 있는 법인데 우혁이랑 서아 씨는 계속 때와 감정이 맞지 않네요.”
“그러게요.”
서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커피만 마셨다. 우혁과 결혼한다고 지금과 달라질 건 하나도 없었다. 하던 대로 그와 같은 집에서 살고 그의 밥을 해주면 그만일 것이다.
그걸로 지금 위기에 빠진 우혁을 구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 그런데 뭔가 서글펐다. 이런 식으로 서둘러하는 결혼이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우혁을 사랑하지만 이렇게 진행되는 결혼이 지속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는 언제나 서아 씨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아 씨가 거절하면 진행하지 않을 겁니다.”
“저, 우혁 오빠 좋아해요.”
“압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제일 쉬운 일이잖아요. 생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건데 어째서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게 말이에요. 우리는 다 죽어요. 죽음을 알지만 지금 죽음을 생각하며 살지는 않잖아요. 어차피 죽을 인생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하, 선택의 여지없이 결혼으로 밀려가는 게 그런 건가요?”
서아가 명쾌한 민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혁 오빠도 이렇게 쫓기듯 결혼을 선택해야 하는 게 많이 속상하고 답답하겠지요?”
“글쎄요…….”
민석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서아는 고개를 숙이고 빈 커피잔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커피 찌꺼기가 얼룩진 바닥이 동굴로 빠지는 입구 같아 보였다.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결혼이 지나치게 빨리 발표되면 가짜 열애설을 덧씌우려 한다고 생각할게 뻔하거든요. 조금 시간을 두는 게 차라리 더 나아요. 당분간은 악플러들 대상으로 소송 카드 쓰며 두 사람을 지키는데 총력을 다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아의 인사에 민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갑자기 우리 사이가 저만치 멀어진 것 같잖아요.”
민석의 말에 서아가 가볍게 웃음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웃는 게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민석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란하게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요란한지 우혁의 집 벨을 누르는데 옆집에서 먼저 내다볼 지경이었다.
서아는 인터폰 화면으로 얼굴을 확인하고 거실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채영이 시상식에라도 나갈 것처럼 화려한 원피스에 풀 메이크업을 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러잖아도 심란한데 채영 씨까지 왜 이러세요?”
서아는 문을 열어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운동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메탈리카의 낫싱 엘스 메덜스(nothing else matters)가 운동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혁은 한 손을 등에 올리고 윗몸일으키기를 하며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서아가 보고 있는 것도 모른 체 윗몸일으키기를 계속하던 우혁은 메탈리카의 기타 연주 속으로 끼어든 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서아는 수건을 집어 들어 우혁에게 건네줬다.
“채영 씨가 계속 벨을 누르는데.”
채영이라는 말에 우혁이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하여튼 걔는 빠지는 적이 없구나.”
“벌써 십 분은 된 거 같은데 꼼짝도 하지 않고 계속 벨을 눌러.”
우혁은 고개를 흔들며 운동실을 나가 밖을 내다보았다. 아침부터 제대로 차려입은 채영을 보며 저건 또 뭔가 싶어 서아를 바라보았다. 서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가짜 열애설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저렇게 차려입고 나섰으면 뻔하지 뭐.”
“하, 윤채영 정말 못 말린다. 못 말려.”
“누구는 좋으시겠어요.”
서아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빈정거리자 우혁은 뭐가 재미있는지 싱글거리고 웃었다.
“이제 웃기까지. 윤채영이 찾아오니까 좋은가 보지? 그렇다 이 말이지. 흥.”
서아가 씩씩거리며 인터폰을 눌러 대문을 열었다. 족히 십 센티미터는 될법한 스트레토 힐을 신고도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온 채영이 들어서자마자 우혁의 목을 잡고 매달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럼 그렇지 오빠가 저렇게 촌스러운 애 하고 진짜 연애를 할 턱이 없지.”
우혁은 채영을 떼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윤채영, 너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그거 아니야. 나 진짜 은서아랑 연애해.”
채영은 우혁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호들갑스럽게 자기 하고 싶은 말만 계속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지민이랑 인나도 뭔가 이상하다고 했었거든. 역시 내 촉이 맞았어.”
우혁이 억지로 떼어놓았지만 채영은 다시 우혁의 팔을 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떠들었다. 서아는 팔짱을 낀 채 그런 채영을 보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윤채영 씨, 그 팔 놔주세요.”
단호한 서아의 말에 채영과 우혁 모두 놀라서 잠시 멈칫했다. 채영은 어이가 없는지 우혁의 몸에 더 바짝 붙으며 서아를 쏘아보았다.
“너 많이 컸다. 오빠가 오냐오냐하니까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이제 다 들통났거든.”
“내 남자한테서 떨어지라고 했습니다.”
서아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지자 이번에는 채영도 움찔하는 눈치였다.
“어머, 별꼴이야. 너 그러다 치겠다.”
눈치 없는 채영이 자신을 도와 달라며 우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우혁은 채영을 확 밀어젖혀 자신의 옆에서 떼어냈다.
“서아가 떨어지라면 떨어져야지.”
“뭐야? 내 앞에서 이렇게까지 연기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모른 체해줄게. 두 사람 가짜라는 거 나만 알고 있을게.”
채영이 우혁을 향해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치 제발 오늘 아침 포털 창을 덮은 그 가짜 열애설이 맞는다고 인정하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서아는 그런 채영의 팔을 낚아채 현관 앞으로 데려 놓고 말했다.
“윤채영 씨 앞으로 이러지 말아 주세요. 저 우혁 오빠랑 결혼할 겁니다.”
“뭐라고?”
채영보다 더 놀란 건 옆에서 듣고 있던 우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