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이 바닥에 앉아 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울어댔다. 서아는 장 대표에게 전화 걸어 채영의 매니저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했다. 허겁지겁 달려 들어온 매니저가 서아와 우혁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매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직 킥복싱 선수였다는 매니저는 체격이 좋고 인상이 험상궂지만 마음은 선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얼마나 달려왔는지 얼굴 전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서아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비타민 음료를 내왔다.
“괜찮아요. 매니저님 이거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서아가 음료를 내밀자 매니저는 마실 여유가 없다는 듯 인사를 한 번 더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차가운 음료가 들어간 주머니가 젖어서 얼룩이 생겼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매니저가 소매를 잡아당겨 여드름 흉터 자국이 울퉁불퉁한 얼굴을 문질렀다. 매니저는 잠시 채영이 울도록 내버려 두더니 곧이어 그녀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근육질인 매니저의 다리가 어찌나 탄탄한지 무릎을 쪼그리는 일이 몹시 어려워 보였다.
“채영 씨, 그만 가요.”
매니저가 어린아이 달래듯 사정했다.
“싫어. 너나 가! 내가 여기서 이런 대접받고 그냥 갈 거 같아? 어림없어. 내가 누구 때문에 아침부터 샵에 다녀왔는데. 엉엉.”
“채영 씨, 내가 봐도 강우혁 배우님 가짜 아니야. 나 같은 사람도 알겠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르겠어. 착각하지 마요.”
“니가 알긴 뭘 안다고 그래.”
채영이 악을 쓰자 매니저가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일어나 소매로 얼굴의 땀을 한 번 더 닦더니 갑자기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한 번 만 더 말해볼게요. 지금 걸어서 갈래요. 아니면 내가 억지로 데려갈까요.”
채영은 매니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껌뻑이더니 안 갈 거라고 너나 가라고 외쳤다. 매니저는 깊은 한숨을 쉬며 서아와 우혁을 향해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를 먼저 했다. 성큼 채영에게 다가간 매니저가 손을 뻗어 그녀를 덥석 안아 들었다.
“놔, 놓으라고. 너 안 놔?”
채영이 발버둥을 쳤지만 매니저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녀를 어깨에 들추어 맨 채 집을 빠져나갔다. 서아는 입을 벌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매니저와 채영을 바라보았다. 채영은 매번 이웃사람들에게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만들어주고 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채영 씨 때문에 심심하지 않겠어요.”
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우혁이 매니저가 열어놓은 현관문을 닫으며 서아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는 눈치 더니 입을 열었다.
“방금 채영이한테 한 말 사실이야?”
서아는 대답을 미룬 채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창 초록이 무성한 여름에 들어왔는데 이제 마당에는 가을이 깊었다. 나무들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바닥에는 떨어진 마른 잎들이 뒹굴어 다녔다. 담장 밖에 있는 상수리나무에서 커다란 도토리가 데크에 딱딱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내가 싫다고 하면 다른 대안이 있어요?”
“그냥 뭉개면서 버텨야지. 대신 달콤한 너의 맛은 하차하고.”
“오빠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우혁이 마른세수를 하며 망설였다. 서아는 그런 우혁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게 맞다. 우혁은 서아와의 결혼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 대표에게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그에게 너무 큰 데미지를 줄 것이다.
“망설이는 오빠 마음 알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결혼을 논할 단계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잖아요.”
서아의 목소리가 너무 냉랭해서 집안의 공기조차 차갑게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운동하느라 땀을 흘린 우혁은 땀이 식느라 서늘한 건지 아니면 서아의 목소리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렇지. 넌 결혼보다는 르 꼬르동 블루가 먼저였으니까.”
‘맞아요. 결혼 같은 거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하지만 오빠가 나에 대한 사랑으로 곁에 있어달라고 청혼하면 대안을 마련해 볼 생각을 했을 거예요. 꼭 르 꼬르동 블루를 다녀야 파티시에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대답이 서아의 입안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말하지 못한 대답을 삼키며 자신의 마음이 왜 이렇게 아픈지 알아차렸다. 결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매일 연예 뉴스 란을 장식하는 연예인 이혼 커플이 될지언정 지금은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 결혼이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혁은 그런 서아의 마음과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결혼이 그의 커리어에 무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망설이며 대답을 하지 못할 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현실적?”
“우리가 차현준이 바라는 대로 추락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한테 놀아나지 말고 버텨야지요. 그러려면 최선의 선택이 결혼인 거 나도 수긍하겠어요.”
“서아야!”
서아의 이름을 부르는 우혁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우혁은 서아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그녀의 정수리에 뺨을 댔다.
“네가 그렇게 생각해 주니 다행이다. 어려운 결심 해줘서 고맙다.”
서아가 생각하는 결혼은 이런 게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는 진심으로 그녀와 같이 가족을 이루어 살고 싶은 마음에 프러포즈를 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는 게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시작하는 게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우혁은 미래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가짜 열애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혼이라고 하지만 나는 너랑 결혼하고 싶었는데 조금 시기를 앞당길 뿐이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있다. 서아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우혁을 밀어내고 돌아섰다. 코맹맹이 소리가 나지 않게 최대한 숨을 몰아쉬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 대표님한테 연락해야 하잖아요. 누구보다 제일 먼저 연락받아할 사람은 장 대표님이니까요.”
“아, 그렇구나.”
우혁이 전화기가 어디 있나 두리번거렸다. 서아는 전화 내용을 듣고 싶지 않아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